백골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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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징포(白骨徵布)는 조선 후기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군적과 세금 대장에 그대로 올려놓고 군포(軍布)를 거두던 일을 이르는 말이다.[1] ‘백골(白骨)에게서 베를 거둔다’는 뜻이다.
조선 후기에는 양인 남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를 냈다. 군포는 병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받던 베이다.[2] 고을마다 거둘 액수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군적에 오른 사람이 죽거나 도망해도 지방관과 아전은 그 자리를 비워 두지 않고 계속 군포를 물렸다. 죽은 사람 몫은 백골징포,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거두는 것은 황구첨정(黃口簽丁), 친척에게 물리는 것은 족징(族徵), 이웃에게 물리는 것은 인징(隣徵)이라 했다.[3] 모두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가운데 군정(軍政)의 문란을 대표하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역사 용어로 주로 쓰이고, 이미 없어진 대상에 세금이나 요금을 계속 물리는 일을 꼬집는 비유로도 쓰인다.
고사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조선 후기 군역 제도에서 생긴 행정 용어이다. ‘흰 뼈’로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한문에 흔하지만, ‘白骨徵布’라는 네 글자는 조선 문헌에만 보인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이른 예는 1659년의 것들이다. 《승정원일기》 효종 10년(1659) 2월 19일 기사에서는 군포 문제를 논하며 “백골징포와 황구충군(白骨徵布,黃口充軍)으로 원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말이 오갔다.[4] 같은 해 현종이 즉위하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천둥 번개의 이변을 계기로 차자를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白骨徵布,黃口充丁,言之慘矣,禁之久矣。而官吏不謹奉行,朝廷亦無以捄正,大行大王深用惻念,特令廟堂裁處,而未及完了。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거두고 어린아이를 장정으로 채우는 일은 말하기도 참혹하며, 금지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고 조정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선왕(효종)께서 깊이 가엾게 여겨 특별히 묘당에 처리하라고 하셨으나 마무리하지 못하셨습니다.”
이경석은 효종의 행장에도 효종이 군병의 원망을 묻자 “백골징포나 황구충정(或白骨徵布,或黃口充丁)”의 원통함이 심했다고 적었다.[6] 1675년(숙종 1)에는 영의정 허적(許積)이 사람 수에 따라 베를 거두는 방안을 내면서 어린아이와 백골에게 거두는 일을 없애자고 했으나, 갑자기 시행하면 원망이 많을 것이라는 반대에 부딪혔다.[7]
《조선왕조실록》 원문에서 ‘白骨徵布’는 47건, 《승정원일기》에서는 238건이 검색되며, 《승정원일기》에서는 영조 대가 137건으로 가장 많다.[8] 양역(良役) 변통 논의가 영조 대에 가장 활발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1750년 군포를 두 필에서 한 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했다.[9] 1752년 병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왕세자에게 올린 균역에 관한 책자는 백골징포가 생기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양역을 질 수 있는 집은 10여만 호뿐인데 50만 명분의 양역을 감당해야 하므로 한 집에서 네다섯 사람이 모두 군포를 내야 하고, 남의 땅을 부치는 이들이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결국 죽거나 달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逃者、死者又無以充其代,則乃有白骨徵布、黃口簽丁之弊,徵族、徵隣,囚繫滿獄,宛轉呼號,感傷和氣。此所以有良役變通之論也。
“달아난 자와 죽은 자의 자리를 또 채울 길이 없으니, 이에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이 생기고, 친척과 이웃에게서 거두어 옥에 갇힌 자가 가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화기(和氣)를 상하게 한다. 이것이 양역을 변통하자는 논의가 생긴 까닭이다.”
그러나 균역법 뒤에도 폐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권8 병전(兵典) 제1조 〈첨정(簽丁)〉에서 첨정하여 베를 거두는 법을 “백성의 뼈에 사무치는 병(爲生民切骨之病)”이라 하고,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법전의 금지 조항과 현실이 거꾸로 되어 있다고 비꼬았다.
法曰白骨徵布,守令論罪。然今之民情,咸以白骨徵布,爲至願大樂。何也?父死子代,物故債、付標債、査正債、都案債,納布旣同,而別斂如此,其不以白骨徵布爲便乎?此法不改,民必盡劉。
“법에는 백골징포를 하면 수령을 처벌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백성의 마음은 모두 백골징포를 지극한 바람이요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왜 그런가? 아비가 죽어 아들이 대신 들어가면 물고채(物故債)·부표채(付標債)·사정채(査正債)·도안채(都案債)를 따로 뜯기니, 내는 베는 같은데 별도로 걷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러니 차라리 백골징포를 편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은 반드시 다 죽을 것이다.” 죽은 사람을 군적에서 빼고 새 사람을 채우는 절차마다 아전이 수수료를 뜯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차라리 죽은 아버지 이름으로 계속 내는 편을 바랐다는 것이다.
- 정약용은 같은 조에 자신의 시 〈애절양(哀絶陽)〉을 싣고 지은 사연을 밝혔다. 1803년(가경 계해) 가을 강진에 있을 때, 갈밭 마을(蘆田)의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아이가 군보(軍保)에 오르고 이정(里正)이 소를 빼앗아 가자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욕을 당한다”며 스스로 생식기를 잘랐고, 그 아내가 그것을 들고 관아에 가 울며 호소했으나 문지기가 막았다는 것이다.[11] 시에는 “시아버지 상복은 막 벗었고 아이는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보에 올랐다(舅喪已縞兒未澡,三代名簽在軍保)”는 구절이 있어, 죽은 시아버지와 갓난아이가 함께 군적에 오른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을 한꺼번에 고발한다.[12]
- 1665년 송준길(宋浚吉)의 상소에는, 남편이 병으로 죽은 지 3년이 지나도록 대신할 사람을 정하지 못해 백골징포를 내고, 일곱 살 아이와 업은 네 살 아이까지 군적에 오르자 남편 무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도망하려던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13]
- 해지한 지 오래된 회선에 요금이 계속 청구되고 있었으니, 전산판 백골징포라 할 만했다.
- 퇴사자 계정에 라이선스 비용을 계속 내고 있던 것을 감사에서 찾아내, 계정 정리 절차를 만들었다.
- 조선 후기 군정의 문란은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으로 대표된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백골징포”,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B0%B1%EA%B3%A8%EC%A7%95%ED%8F%AC, 확인날짜=2026-10-11.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군포”,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5%B0%ED%8F%AC, 확인날짜=2026-10-11.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황구첨정”·“족징”·“인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D%99%A9%EA%B5%AC%EC%B2%A8%EC%A0%95,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효종 10년 2월 19일 경진, https://sjw.history.go.kr/id/SJW-B10020190-01300,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 10월 11일 무술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ra_10010011_003, 확인날짜=2026-10-11.
- ↑ 이경석(李景奭), 〈효종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행장(孝宗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行狀)〉, 《백헌집(白軒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341A_0180_010_001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341A_0180_010_0010,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3권, 숙종 1년 4월 10일 무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sa_10104010_001,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승정원일기 검색, “白骨徵布”, https://sillok.history.go.kr/ ; https://sjw.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11.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균역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7%A0%EC%97%AD%EB%B2%95,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75권, 영조 28년 1월 13일 을해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ua_12801013_001, 확인날짜=2026-10-11.
- ↑ 11.0 11.1 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권8 병전(兵典) 〈첨정(簽丁)〉,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5집 권23,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97A_1280_030_001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97A_1280_030_0010, 확인날짜=2026-10-11.
- ↑ 정약용(丁若鏞), 〈애절양(哀絶陽)〉,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시문집 권4,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97A_0040_010_103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97A_0040_010_1030, 확인날짜=2026-10-11.
- ↑ 송준길(宋浚吉), 〈응구언별유잉걸해직소(應求言別諭仍乞解職疏) 을사 11월〉, 《동춘당집(同春堂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366A_0060_010_010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366A_0060_010_0100, 확인날짜=202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