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고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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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三顧草廬)는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 있게 정성을 다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삼국 시대 유비(劉備)가 난양(南陽)에 은거하던 제갈량(諸葛亮)의 초옥을 세 번 찾아간 데서 유래한다. ‘초려삼고(草廬三顧)’라고도 한다.[1]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蜀書)·제갈량전(諸葛亮傳)〉은 이 일을 짧게 적는다.[4]
時先主屯新野。徐庶見先主,先主器之,謂先主曰:「諸葛孔明者,臥龍也,將軍豈願見之乎?」先主曰:「君與俱來。」庶曰:「此人可就見,不可屈致也。將軍宜枉駕顧之。」由是先主遂詣亮,凡三往,乃見。
“그때 선주(유비)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나자 선주는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제갈공명은 누운 용(臥龍)입니다. 장군께서는 만나 보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하자 선주는 ‘그대가 함께 데려오시오’라고 했다. 서서는 ‘이 사람은 찾아가 만날 수는 있어도 굽혀서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몸을 굽혀 찾아가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선주는 제갈량을 찾아갔는데,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
제갈량 자신도 뒷날 북벌에 나서며 후주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에서 이 일을 회고했다. 이 구절이 ‘三顧’와 ‘草廬’라는 말의 직접 출전이다.[4][2]
臣本布衣,躬耕於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驅馳。
“신은 본래 벼슬 없는 선비로 난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 보전하려 했을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초가로 신을 찾아오시어 당대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위해 힘껏 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계대백과사전》은 이 일을 207년(건안 12)의 일로 적는다.[3]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계책을 말한 것이 이른바 ‘융중대(隆中對)’이다.
배송지(裴松之)가 《삼국지》에 붙인 주석에는 이와 반대로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는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자 제갈량은 형주가 곧 공격받을 것을 알고 북쪽으로 가서 번성(樊城)에 주둔한 유비를 만났다(亮乃北行見備). 유비는 처음에 나이 어린 제갈량을 여느 선비로 대했으나, 제갈량이 형주의 떠돌이 호구를 호적에 올려 병력을 늘리라는 계책을 내자 그를 상객으로 대했다고 한다. 배송지는 사마표(司馬彪)의 《구주춘추(九州春秋)》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적었다.[4]
그러나 배송지 자신은 이 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臣松之以為亮表云「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則非亮先詣備,明矣。雖聞見異辭,各生彼此,然乖背至是,亦良為可怪。
“제가 보건대, 제갈량이 표에서 ‘선제께서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초가로 찾아오시어 당대의 일을 물으셨다’고 했으니,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듣고 본 것이 달라 이런저런 말이 생길 수는 있으나, 이토록 어긋나는 것은 참으로 괴이하다.”[4]
널리 알려진 삼고초려의 세부 장면은 대부분 명나라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37~38회에서 온 것이다. 관우·장비와 함께 찾아갔다가 첫 번째와 두 번째에는 헛걸음을 하고, 세 번째에 낮잠 자는 제갈량이 깰 때까지 뜰에서 기다리자 장비가 화를 내며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하는 장면 등은 정사 《삼국지》에는 없다. 정사가 전하는 것은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凡三往,乃見)”는 한 구절뿐이다.
‘三顧草廬’라는 네 글자는 남조 《남사(南史)》 〈원담전(袁湛傳)〉에 원앙(袁昂)이 명제에게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삼고초려를 입었다(遂蒙三顧草廬)”고 한 말에 이미 보인다.[2] 당나라 두보(杜甫)는 금관성(錦官城, 청두) 밖의 제갈량 사당을 찾아 지은 칠언율시 〈촉상(蜀相)〉에서 “세 번 찾아와 번거로이 천하의 계책을 물으니, 두 조정을 열고 건진 늙은 신하의 마음이었다(三顧頻煩天下計,兩朝開濟老臣心)”고 읊었다. 이 시는 《삼국지연의》 제105회에서 제갈량이 죽은 뒤에도 인용된다.[5] 한국 문헌에서는 김시습(金時習)이 〈와룡(臥龍)〉 시에서 “삼고초려로 겸손히 선비에게 몸을 낮추니 와룡이 떨쳐 일어나 기이한 공을 세웠다(三顧草廬謙下士。臥龍奮起逞奇功)”고 읊었다.[6]
| 한자 | 음 | 기본 의미 | 성어 안의 의미 |
|---|---|---|---|
| 三 | 삼 | 셋 | 세 번 |
| 顧 | 고 | 돌아보다 | 찾아가다, 방문하다 |
| 草 | 초 | 풀 | 풀(짚·갈대)로 지붕을 인 |
| 廬 | 려 | 오두막집 | 초가, 오두막 |
- 스타트업 대표는 삼고초려 끝에 대기업 보안 책임자를 최고기술책임자로 영입했다.
- 구단은 은퇴를 고민하던 베테랑 감독을 삼고초려해 사령탑에 앉혔다.
- 인재를 얻으려면 삼고초려의 정성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 명종 21년(1566) 10월 7일, 명종은 여러 번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던 조식(曺植)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옛날에 초가로 세 번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어찌하여 한 번 불러서는 오지 않고 세 번 찾은 뒤에야 나왔는가”라고 물었다. 조식은 “그때는 어지러운 세상이라 반드시 영웅을 얻어야 일을 이룰 수 있었으므로 세 번까지 찾아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도 “제갈량이 유비와 함께 30년 가까이 일했으나 천하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그가 나선 것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실록의 사관은 조식이 그동안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일부러 삼고를 물어 그 속뜻을 살핀 것이라고 적었다. 조식은 이 만남 뒤 판관(判官) 벼슬을 받았으나 하직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7]
- 일본의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은 제갈량 쪽에서 본 말로 ‘삼고의 은혜(三顧の恩)’라는 표현도 쓸 수 있다고 설명한다.[3]
- 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모려(三顧茅廬): 같은 뜻.
-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물고기처럼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사이. 제갈량을 얻은 유비가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데서 나왔다.[4]
- 구현약갈(求賢若渴), 예현하사(禮賢下士): 목마른 듯 어진 이를 구함, 어진 이를 예로 대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춤. 《성어전》이 가까운 말로 든다.[2]
- 토포악발(吐哺握髮): 먹던 것을 뱉고 감던 머리를 쥔 채 손님을 맞음. 인재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 《성어전》은 ‘악발토포(握髮吐哺)’를 가까운 말로 든다.[2]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삼고초려”,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82%BC%EA%B3%A0%EC%B4%88%EB%A0%A4, 확인날짜=2026-09-26.
- ↑ 2.0 2.1 2.2 2.3 2.4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三顧茅廬”,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100, 확인날짜=2026-09-26.
- ↑ 3.0 3.1 3.2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三顧の礼”,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4%B8%89%E9%A1%A7%E3%81%AE%E7%A4%BC, 확인날짜=2026-09-26.
- ↑ 4.0 4.1 4.2 4.3 4.4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제갈량전(諸葛亮傳)〉.
- ↑ 두보(杜甫), 〈촉상(蜀相)〉;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105회.
-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김시습(金時習), 《매월당집(梅月堂集)》 시집 권2 〈와룡(臥龍) 3수〉,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69A_0050_010_0130, 확인날짜=2026-09-26.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 10월 7일 갑자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ma_12110007_001, 확인날짜=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