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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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格物致知)는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을 뜻하는 한자성어이다.[1]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팔조목(八條目)의 첫째와 둘째인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이은 것이다. 줄여서 격치(格致)라고도 한다.[1]
《대학》의 팔조목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격물치지는 그 출발점이다. 그런데 《대학》에는 다른 여섯 조목과 달리 격물치지를 풀이한 대목이 없어서, ‘格’과 ‘物’을 어떻게 읽느냐를 두고 송나라 이후 유학의 큰 논쟁이 벌어졌다. 주희(朱熹)는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는 것으로, 왕수인(王守仁, 왕양명)은 마음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 풀었다.[2]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주로 주희의 해석에 따라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해 앎을 넓힌다’는 뜻으로 쓰며, 학문과 탐구 정신을 강조하는 표어로도 흔히 쓰인다. 중국어(gé wù zhì zhī)와 일본어(かくぶつちち)에서도 같은 한자로 쓴다.[3][2]
《대학》 첫머리에 팔조목을 거슬러 올라가며 말하다가 마지막에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는 데 있다(致知在格物)”고 하고, 다시 차례대로 내려온다.[4]
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物格而後知至,知至而後意誠,意誠而後心正,心正而後身脩,身脩而後家齊,家齊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했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한 사람은 먼저 그 앎을 지극히 했으니,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는 데 있다. 사물에 나아간 뒤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안해진다.”
《대학》 원문에는 ‘格物致知’ 네 글자가 이 순서로 붙어 나오지 않는다. 《성어전》은 이 구절을 語本으로 들고,[3] 《일본국어대사전》도 “致知在格物”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한다.[2]
《대학》은 뒤에서 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한 단락씩 풀이하지만, 격물과 치지를 풀이한 단락은 없다. 주희는 원래 있던 풀이가 없어졌다고 보고, 정이(程頤)의 뜻을 빌려 스스로 한 단락을 지어 넣었다. 이것이 이른바 〈격물보전(格物補傳)〉이다.[5]
右傳之五章,蓋釋格物、致知之義,而今亡矣。閒嘗竊取程子之意以補之曰:「所謂致知在格物者,言欲致吾之知,在即物而窮其理也。蓋人心之靈莫不有知,而天下之物莫不有理,惟於理有未窮,故其知有不盡也。……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則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而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矣。」
“이상 전의 다섯째 장은 격물과 치지의 뜻을 풀이한 것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근래 정자의 뜻을 빌려 이렇게 보충한다. ‘이른바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사물에 나아가는 데 있다는 것은, 나의 앎을 지극히 하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끝까지 캐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 마음의 신령함에는 앎이 없지 않고 천하의 사물에는 이치가 없지 않은데, 다만 이치를 다 캐지 못했기 때문에 앎에 다하지 못한 데가 있는 것이다. …… 힘을 쓴 지 오래되어 어느 날 환하게 꿰뚫리면, 뭇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침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큰 쓰임이 밝아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 정현(鄭玄): 후한의 정현은 《예기》 주석에서 “格은 온다는 뜻이고, 物은 일과 같다(格,來也。物,猶事也)”고 하여, 선을 깊이 알면 좋은 일이 오고 악을 깊이 알면 나쁜 일이 온다고 풀었다.[6]
- 정이·주희: 북송의 정이는 격물을 이치를 캐는 궁리(窮理)와 연결하여, 사물 하나하나의 이치를 캐 나가다 보면 마침내 ‘탈연관통(脫然貫通)’하게 된다고 했다. 주희는 이를 이어 格을 ‘이르다(至)’, 物을 ‘일(事)’로 읽고 위의 〈격물보전〉을 지었다.[2]
- 왕수인: 명나라의 왕수인은 格을 ‘바로잡다(正)’로 읽어, 격물을 바깥 사물을 탐구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일로 보고, 치지를 타고난 양지(良知)를 다 발휘하는 ‘치양지(致良知)’로 풀었다.[2]
왕수인이 주희의 격물을 그대로 실천해 보려다 병이 났다는 이야기는 그의 어록 《전습록(傳習錄)》 하권에 본인의 말로 실려 있다.[7]
初年與錢友同論做聖賢,要格天下之物,如今安得這等大的力量?因指亭前竹子,令去格看。錢子早夜去窮格竹子的道理,竭其心思;至於三日,便致勞神成疾。當初說他這是精力不足,某因自去窮格,早夜不得其理;到七日,亦以勞思致疾。遂相與嘆聖賢是做不得的,無他大力量去格物了。
“젊은 시절 전(錢)씨 벗과 성현이 되는 길을 함께 논하면서, 천하의 사물을 격해야 한다지만 어디서 그런 큰 힘을 얻겠느냐 하고, 정자 앞의 대나무를 가리키며 가서 격해 보라 했다. 전씨는 밤낮으로 대나무의 이치를 캐느라 마음을 다 쏟다가 사흘 만에 지쳐 병이 났다. 처음에는 그의 정력이 모자라서라고 했는데, 내가 직접 가서 캐 보니 밤낮으로 그 이치를 얻지 못하고 이레 만에 나도 생각에 지쳐 병이 났다. 그래서 둘이 함께, 성현은 될 수 없는 것이니 격물할 만한 큰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탄식했다.” 왕수인은 이어서 귀주의 오랑캐 땅(夷中)에서 3년을 지낸 뒤에야 “천하의 사물에는 본래 격할 것이 없고, 격물 공부는 오직 몸과 마음에서 하는 것”임을 알았다고 말한다.[7] 이 일화는 흔히 ‘이레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대나무만 바라보았다’는 식으로 부풀려 전해지지만, 원문에는 밤낮으로 궁리하다 이레 만에 병이 났다고만 되어 있다.
서양 학문이 들어오면서 격물·격치는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번역어로 쓰였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앞서 서양 해부학서를 옮긴 《해체신서(解体新書)》(1774)가 사람 몸에서 탐구할 수 있는 것을 말하며 ‘格致’라는 말을 썼다(凡一身可格致者二矣).[8] 청나라 말에는 장지동(張之洞)이 세운 호북 자강학당(自強學堂)이 방언(외국어)·격치·산학·상무의 네 과로 나누고 격치는 “화학·중학(역학)·전학·광학 등을 겸해 통한다(格致兼通化學、重學、電學、光學等事)”고 설명했으며,[9] 루쉰(魯迅)은 《외침(吶喊)》 자서에서 ‘N’에 가서 ‘K학당’에 들어가서야 “세상에 이른바 격치·산학·지리·역사·회화·체조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纔知道世上還有所謂格致、算學、地理、歷史、繪圖和體操)”고 회고했다.[10]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은 충목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도당에 글을 올려 사서를 강론하게 해 “격물치지·성의정심의 도를 익히게 하라”고 청했다.[11] 1392년(태조 1) 11월 간관들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가 “도술을 밝히고 인재를 분별하며 정치의 대체를 살피고 민정을 살피는 것으로 격물치지의 요체를 삼았다”고 설명하며 경연에서 《대학》을 강론하라고 청했다.[12]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格物致知가 49건 보인다.[13]
일본에서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가 《소라이 선생 답문서(徂徠先生答問書)》(1725)에서 “격물치지라는 것을 송나라 유학자들이 잘못 보아 바람·구름·우레·비의 일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이치까지 캐는 것을 학문이라 여기게 되었다”고 비판했는데, 《일본국어대사전》은 이를 첫 용례로 든다.[2]
- 격물치지의 자세로 장애 로그를 한 줄씩 따라가다 보니 원인이 설정 파일의 오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옛 선비들은 격물치지를 공부의 첫걸음으로 삼았다.
- 연구실 벽에 ‘격물치지’ 네 글자를 붙여 두고 탐구의 첫걸음을 되새긴다.
- ↑ 1.0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격물치지”,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2%A9%EB%AC%BC%EC%B9%98%EC%A7%80, 확인날짜=2026-10-03.
- ↑ 2.0 2.1 2.2 2.3 2.4 2.5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개정신판 세계대백과사전(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格物致知”,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A0%BC%E7%89%A9%E8%87%B4%E7%9F%A5, 확인날짜=2026-10-03.
- ↑ 3.0 3.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格物致知”,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9978, 확인날짜=2026-10-03.
- ↑ 4.0 4.1 《예기(禮記)》 〈대학(大學)〉; 주희(朱熹), 《대학장구(大學章句)》 경 1장.
- ↑ 5.0 5.1 주희(朱熹),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5장.
- ↑ 《예기정의(禮記正義)》 권60 〈대학〉 정현 주.
- ↑ 7.0 7.1 7.2 왕수인(王守仁), 《전습록(傳習錄)》 권하.
- ↑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格致”,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A0%BC%E8%87%B4, 확인날짜=2026-10-03.
- ↑ 장지동(張之洞), 〈설립자강학당편(設立自強學堂片)〉; 조이손(趙爾巽) 등, 《청사고(淸史稿)》 권107 〈선거지(選舉志)〉.
- ↑ 루쉰(魯迅), 〈자서(自序)〉, 《외침(吶喊)》, 1923.
- ↑ 이제현(李齊賢), 〈상도당서(上都堂書)〉, 《익재난고(益齋亂藁)》,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03.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14일 신묘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aa_10111014_001, 확인날짜=2026-10-03.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格物致知”,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