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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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이하(瓜田李下)는 오이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자두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남에게 의심받기 쉬운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한자성어이다.[1] 옛 악부시 〈군자행(君子行)〉의 “瓜田不納履,李下不正冠”을 줄인 말이다.
오이밭에서 허리를 굽혀 신을 고쳐 신으면 오이를 따는 것처럼 보이고, 자두나무 아래에서 손을 올려 갓을 고쳐 쓰면 자두를 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잘못이 없더라도 의심을 살 만한 자리와 행동은 처음부터 피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날에는 공직자나 심사위원처럼 공정성이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처신을 두고 자주 쓰며, “과전이하의 혐의”처럼 ‘의심받을 만한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앞뒤 구절을 나눈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도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로 올라 있다.[2][3]
중국어에서도 ‘瓜田李下(guā tián lǐ xià)’라고 하며,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의심을 사기 쉬운 자리”를 비유하는 말로 풀이하고 흔히 ‘瓜田李下之嫌’의 꼴로 쓴다고 설명한다.[4] 일본어에서도 ‘瓜田李下(かでんりか)’라고 하지만, 줄이지 않고 ‘瓜田に履を納れず、李下に冠を正さず’라고 하는 편이 더 일반적이다.[5]
송나라 곽무천(郭茂倩)이 엮은 《악부시집(樂府詩集)》 권32 〈상화가사(相和歌辭) 7〉에 작자를 알 수 없는 고사(古辭) 〈군자행〉이 실려 있다.[6]
君子防未然,不處嫌疑間。瓜田不納履,李下不正冠。嫂叔不親授,長幼不比肩。勞謙得其柄,和光甚獨難。周公下白屋,吐哺不及餐。一沐三握髮,後世稱聖賢。
“군자는 일이 생기기 전에 막고, 의심받을 자리에 있지 않는다. 오이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않고, 자두나무 아래서는 갓을 바로 쓰지 않는다. 형수와 시동생은 손수 물건을 주고받지 않고, 어른과 아이는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다. 수고하면서도 겸손하면 그 근본을 얻지만, 빛을 누그러뜨려 세속과 어울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주공(周公)은 초가집 선비에게도 몸을 낮추어, 먹던 밥을 뱉고 나가 맞느라 끼니를 제대로 들지 못했고, 한 번 머리를 감는 사이에 세 번이나 머리채를 쥐고 나갔으니, 후세가 성현이라 일컫는다.”
《악부시집》이 인용한 《악부해제(樂府解題)》는 “고사에 ‘군자는 미연에 막는다’고 한 것은 혐의를 멀리하라는 말”이라고 풀이한다.[6] 《성어전》도 이 시를 典源으로 든다.[4]
표준국어대사전은 과전불납리·이하부정관을 “《문선》의 〈군자행〉에 나오는 말”로 설명하고,[2][3] 나무위키 등에는 《문선》 권27의 악부 고사 〈군자행〉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선(李善)이 주석한 《문선》 권27의 악부 고사는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상가행(傷歌行)〉·〈장가행(長歌行)〉 세 수이다. 권28에 실린 〈군자행〉은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같은 제목 작품으로 “천도는 평탄하고 간략하나 인도는 험하고 어렵다(天道夷且簡,人道嶮而難)”로 시작하며, 이선은 그 제목 아래 주석에 “오언 고시 〈군자행〉에 ‘君子防未然,不處嫌疑間’이라 했다”고 첫 두 구만 인용했다.[7]
작자에 대해서는 명나라 낭영(郎瑛)이 《칠수유고(七修類稿)》 권26 〈과전이하출처(瓜田李下出處)〉에서 “사람들이 모두 ‘과전이하’ 두 구절을 알지만 누가 지었는지는 모른다. 좌극명(左克明)은 《고악부(古樂府)》에 싣고 ‘고사’라 했으나, 이것이 진사왕(陳思王, 조식)의 작품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8] 《성어전》은 작자를 무명씨로 적는다.[4]
비슷한 표현은 전한의 유향(劉向)이 엮은 《열녀전(列女傳)》 권6 〈제위우희(齊威虞姬)〉에도 나온다. 제나라 위왕(威王)의 후궁 우희(虞姬)가 간신 주파호(周破胡)를 물리치라고 간하자, 파호는 우희가 어려서 북곽 선생(北郭先生)과 사통했다고 모함했다. 갇혀 심문을 받던 우희는 위왕 앞에서 자신의 첫째 죄를 이렇게 말했다.
經瓜田不躡履,過李園不正冠,妾不避,此罪一也。
“오이밭을 지날 때는 신을 끌지 않고 자두밭을 지날 때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 법인데, 제가 그런 혐의를 피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첫째 죄입니다.” 위왕은 깨닫고 우희를 풀어 준 뒤 주파호를 삶아 죽였다.[9]
네 글자로 줄인 瓜田李下는 동진의 간보(干寶)가 엮은 《수신기(搜神記)》 권15에 이미 보인다. 죽었다가 저승에서 잘못 불려 왔음이 밝혀져 돌아가던 가우(賈偶)가 밤길에 혼자 가는 젊은 여인을 만났는데, 여인은 “날이 저물어 과전이하의 비난을 받을까 두려웠다(懼獲瓜田李下之譏)”며 그의 곁에 머물렀으나 끝내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10][4] 《일본국어대사전》도 《수신기》 권15를 전거로 든다.[5]
《북제서(北齊書)》 권42 〈원율수전(袁聿修傳)〉에는 원율수(袁聿修)가 연주(兗州) 자사 형소(邢邵)가 보낸 흰 비단을 돌려보내며 쓴 편지에 “과전이하는 옛사람이 삼가던 바이다(瓜田李下,古人所慎)”라는 구절이 있다.[11] 오대의 《당척언(唐摭言)》에는 줄여서 ‘과리지혐(瓜李之嫌)’이라 한 예가 보인다.[12]
이황(李滉)은 제자 이정(李楨)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함을 받게 된 까닭을 두고 “이는 공이 과전이하의 혐의를 피하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다(此乃公不避瓜田李下之嫌,以至於此)”라고 했다.[13] 송시열(宋時烈)의 편지와 상소에도 “과전이하의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不避瓜田李下之嫌)”는 표현이 여러 번 보인다.[14]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瓜田李下가 보이지 않고, 줄인 형태인 瓜李之嫌이 한 건 있다. 1700년(숙종 26) 사헌부는 문과 복시의 시관 오도일(吳道一)이 친분 있는 사람의 답안을 억지로 뽑았다며, 비록 응시자와 내통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과리지혐은 면하기 어렵다”고 파직을 청했다.[15]
- 입찰 심사위원이 참여 업체 관계자와 따로 식사를 하는 것은 과전이하의 처신이 아니다.
- 권한 관리자라면 과전이하를 생각해, 자기 계정의 권한 변경은 다른 사람의 승인을 받도록 해 두는 것이 좋다.
- 공직자는 사소한 선물이라도 과전이하의 경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과전이하”,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3%BC%EC%A0%84%EC%9D%B4%ED%95%98, 확인날짜=2026-09-28.
- ↑ 2.0 2.1 2.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과전불납리”,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3%BC%EC%A0%84%EB%B6%88%EB%82%A9%EB%A6%AC, 확인날짜=2026-09-28.
- ↑ 3.0 3.1 3.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이하부정관”,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9D%B4%ED%95%98%EB%B6%80%EC%A0%95%EA%B4%80, 확인날짜=2026-09-28.
- ↑ 4.0 4.1 4.2 4.3 4.4 4.5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瓜田李下”,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46, 확인날짜=2026-09-28.
- ↑ 5.0 5.1 5.2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瓜田李下”,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7%93%9C%E7%94%B0%E6%9D%8E%E4%B8%8B, 확인날짜=2026-09-28.
- ↑ 6.0 6.1 6.2 곽무천(郭茂倩) 편, 《악부시집(樂府詩集)》 권32 〈상화가사(相和歌辭) 7·평조곡(平調曲) 3〉 〈군자행(君子行)〉.
- ↑ 소통(蕭統) 편, 이선(李善) 주, 《문선(文選)》 권27 〈악부 상(樂府上)〉, 권28 〈악부 하〉 육기 〈군자행〉.
- ↑ 낭영(郎瑛), 《칠수유고(七修類稿)》 권26 〈과전이하출처(瓜田李下出處)〉.
- ↑ 9.0 9.1 유향(劉向), 《열녀전(列女傳)》 권6 〈변통전(辯通傳)·제위우희(齊威虞姬)〉.
- ↑ 간보(干寶), 《수신기(搜神記)》 권15.
- ↑ 11.0 11.1 《북제서(北齊書)》 권42 〈원율수전(袁聿修傳)〉.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瓜李之嫌”,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803, 확인날짜=2026-09-28.
- ↑ 이황(李滉), 〈여이강이(與李剛而)〉, 《퇴계집(退溪集)》 권21,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144A_0210_010_0230, 확인날짜=2026-09-28.
- ↑ 송시열(宋時烈), 〈사학청류후남귀진정소(四學請留後南歸陳情疏)〉,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367A_0210_010_0070,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34권, 숙종 26년 1월 3일 정유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sa_12601003_002, 확인날짜=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