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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고슬(膠柱鼓瑟)은 아교풀로 거문고나 비파의 기러기발을 붙여 놓고 연주하면 음조를 바꿀 수 없다는 뜻으로, 고지식하여 조금도 융통성이 없음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줄여서 ‘교슬(膠瑟)’이라고도 한다.[1]

‘슬(瑟)’은 줄마다 받침(柱, 기러기발)이 있어 그것을 옮겨 가며 소리의 높낮이를 맞추는 옛 현악기이다.[2]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버리면 곡이 바뀌어도 음을 조절할 수 없다. 이 비유로 규칙이나 옛 방식에만 매달려 달라진 상황에 맞추지 못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한국어에서는 슬을 흔히 거문고로 옮겨 풀이한다.

중국어에서도 같은 형태로 쓰며, 《성어전》은 ‘수주대토(守株待兔)’, ‘각주구검(刻舟求劍)’을 가까운 말로 든다.[2] 일본어에서는 ‘膠柱(こうちゅう)’ 또는 ‘琴柱に膠す(ことじににかわす)’라고 한다.[3]

《사기》의 조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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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이 드는 출전은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이다.[4] 전국 시대 조(趙)나라 효성왕 7년(기원전 260년), 진(秦)나라와 조나라 군대가 장평(長平)에서 맞섰다. 조나라 장수 염파(廉頗)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싸우지 않자, 진나라는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나라 왕이 그 말을 믿고 조괄로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병석에 있던 인상여(藺相如)가 말렸다.

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而鼓瑟耳。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趙王不聽,遂將之。

[4]

“왕께서 이름만 보고 조괄을 쓰시는 것은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놓고 슬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 아버지가 남긴 병서를 읽을 줄만 알 뿐, 변화에 맞출 줄을 모릅니다.” 조나라 왕은 듣지 않고 조괄을 장수로 삼았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천하에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여겼고, 아버지 조사와 병법을 논하면 아버지도 그를 꺾지 못했다. 그러나 조사는 아내에게 “전쟁은 죽고 사는 땅인데 괄은 그것을 쉽게 말한다(兵,死地也,而括易言之). 조나라가 괄을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대를 깨뜨릴 자는 반드시 괄일 것”이라고 했다. 조괄이 출정하게 되자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남편은 받은 상을 모두 군리와 사대부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아들은 왕이 내린 금과 비단을 집에 쌓아 두고 살 만한 땅과 집을 살핀다며 장수로 보내지 말라고 했다. 왕이 이미 정했다고 하자, 어머니는 일이 잘못되더라도 집안이 연좌되지 않게 해 달라고 청했고 왕은 허락했다.[4]

조괄은 염파의 군령과 군리를 모두 바꾸었다.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며 조나라 군의 보급로를 끊고 군대를 둘로 갈랐다. 40여 일 동안 굶주린 조나라 군은 조괄이 활에 맞아 죽자 수십만 명이 항복했고, 진나라는 이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 조나라가 앞뒤로 잃은 군사는 45만 명에 이르렀다.[4]

나무위키 등에는 조괄의 어머니가 왕에게 “남편이 늘 아들은 병서만 붙잡고 군사를 안다고 착각한다고 말했다”고 아뢴 것처럼 소개된 경우가 있으나, 《사기》에서 그 말은 조사가 생전에 아내에게 한 말이고, 어머니가 왕에게 아뢴 것은 부자가 재물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또 인상여가 병들었다는 대목을 ‘病甐’으로 옮긴 경우가 보이는데, 원문은 ‘病篤(병이 위중하다)’이다.[4]

더 이른 형태: 《문자》의 ‘교주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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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이 말의 근원을 《사기》보다 《문자(文子)》 〈도덕(道德)〉에서 찾는다.[2]

老子曰:「執一世之法籍,以非傳代之俗,譬猶膠柱調瑟。聖人者,應時權變,見形施宜。世異則事變,時移則俗易,論世立法,隨時舉事。」

“한 시대의 법전을 붙들고 대대로 전해 온 풍속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 슬을 타는 것과 같다. 성인은 때에 맞게 저울질하여 바꾸고, 형편을 보아 알맞게 베푼다. 세상이 다르면 일이 바뀌고, 때가 옮겨 가면 풍속이 달라진다.” 곧 이 비유는 처음부터 ‘옛 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정치론 속에서 쓰였다. 한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 〈상자(相刺)〉에도 “옛글을 굳게 붙들고 지금 세상에 대응하는 것은 ……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슬을 타는 것과 같아, 굳어서 맞추기 어렵다(堅據古文以應當世……膠柱而調瑟,固而難合矣)”는 말이 있다.[2]

《성어전》은 네 글자 ‘膠柱鼓瑟’의 용례로 원나라 왕정(王禎)의 《농서(農書)》, 명나라 여계등(余繼登)의 《전고기문(典故紀聞)》, 《경세통언》, 《홍루몽》 제120회 등을 든다. 《홍루몽》 제120회에는 “이렇게 뿌리를 캐고 끝까지 따지는 것은 각주구검이요 교주고슬이다(便是刻舟求劍,膠柱鼓瑟了)”라고 두 성어를 나란히 쓴 대목이 있다.[2]

한국 문헌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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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초의 금석문: 고려 광종 13년(962)에 세운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의 명문에서, 글을 지은 김원(金遠)은 자신을 낮추어 “저는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인 듯 고지식하고, 배에 표시를 새겨 칼을 찾는 듯 어리석은 사람(僕者膠柱頑流,尅舟膚物)”이라고 했다. 교주고슬과 각주구검을 짝지어 겸사로 쓴 것이다.[5]
  • 성종 8년(1477):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은 상서에서 “옛것에 얽매일 줄만 알고 시대의 변화에 통하지 못하면 교주고슬이 되어 치도를 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 백성은 중국과 다르다며 당장의 편리만 좇는 것은 고식지계라고 경계했다.[6]
  • 선조 5년(1572): 유희춘(柳希春)은 경연에서 임금의 수성(守成)을 큰 집에 사는 일에 비유하며, 조상이 지은 집을 헐고 옮기는 것도 잘못이지만 지붕이 새고 서까래가 썩어도 고치지 않고 지키기만 하는 것은 교주고슬이라 다스림이 될 수 없다고 했다.[7]

일본에서는 《일본국어대사전》이 ‘膠柱’의 첫 용례로 헤이안 시대 귀족의 일기 《중우기(中右記)》 장지(長治) 2년(1105) 2월 28일 기사를 든다.[3]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膠 교 아교 아교로 붙이다
柱 주 기둥 현악기의 줄 받침(기러기발)
鼓 고 북, 두드리다 (악기를) 타다, 연주하다
瑟 슬 큰 거문고 슬(옛 현악기)
  • 트래픽 패턴이 바뀌었는데도 3년 전에 정한 임곗값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은 교주고슬이다.
  • 규정의 취지는 보지 않고 글자에만 매달리는 교주고슬식 행정이 민원을 키웠다.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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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슬(膠瑟): 같은 뜻이다.
  • 교주조슬(膠柱調瑟): 《문자》의 형태.[2]
  • 각주구검(刻舟求劍): 배에 표시를 새겨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음. 융통성 없이 현실에 맞지 않는 방법을 고집함.
  • 수주대토(守株待兔):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림.
  • 지상담병(紙上談兵):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함. 실제 경험 없이 이론만 앞세운다는 뜻으로, 같은 조괄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반대 의미: 수기응변(隨機應變), 통권달변(通權達變).[2]
  1.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교주고슬”,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5%90%EC%A3%BC%EA%B3%A0%EC%8A%AC, 확인날짜=2026-09-26.
  2. ↑ 2.0 2.1 2.2 2.3 2.4 2.5 2.6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膠柱鼓瑟”,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863, 확인날짜=2026-09-26.
  3. ↑ 3.0 3.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 “膠柱”,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86%A0%E6%9F%B1, 확인날짜=2026-09-26.
  4. ↑ 4.0 4.1 4.2 4.3 4.4 사마천, 《사기》 권81 〈염파·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5.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https://db.history.go.kr/id/gsko_003_0280, 확인날짜=2026-09-26.
  6.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86권, 성종 8년 11월 26일 기축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ia_10811026_001, 확인날짜=2026-09-26.
  7.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10월 19일 임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0510019_001, 확인날짜=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