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신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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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신적자(亂臣賊子)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불효한 자식이라는 뜻으로, 임금과 부모를 거스르는 무리, 곧 나라와 인륜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난신(亂臣)’은 임금을 거슬러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 ‘적자(賊子)’는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이다. 《맹자》에서 공자가 《춘추》를 짓자 이런 자들이 두려워했다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역적과 패륜아를 함께 꾸짖는 가장 무거운 말 가운데 하나였다. 옛 문헌에서는 반역을 꾀한 자, 임금을 시해한 자를 가리켜 썼고, 오늘날에는 공동체의 질서와 도리를 저버린 사람을 크게 비난할 때 쓴다.
중국어에서도 같은 글자로 쓴다.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임금이나 아버지의 명을 거스르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으로 풀이하고, ‘난신역자(亂臣逆子)’라고도 한다고 적는다.[2] 일본어에서는 ‘乱臣賊子(らんしんぞくし)’라고 하며, 《일본국어대사전》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으로 풀이한다.[3]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나온 말이다. 제자 공도자(公都子)가 “바깥사람들이 모두 선생님께서 논쟁을 좋아하신다고 한다”고 하자, 맹자는 자기가 논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한다며 성인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은 역사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공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世衰道微,邪說暴行有作。臣弒其君者有之,子弒其父者有之。孔子懼,作《春秋》。
“세상이 쇠하고 도가 희미해져 그릇된 학설과 포악한 행동이 일어났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는 일이 있었고, 자식이 그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있었다. 공자께서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셨다.” 그리고 맹자는 말을 맺으며 이렇게 정리했다.
昔者禹抑洪水而天下平,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리자 천하가 평안해졌고, 주공이 오랑캐를 아우르고 맹수를 몰아내자 백성이 편안해졌으며,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 맹자는 이어서 자기도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그릇된 학설을 막아 이 세 성인을 잇고자 한다고 했다.
앞 대목과 맞추어 보면 ‘난신’은 임금을 시해하는 신하, ‘적자’는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식이다. 공자가 《춘추》에서 이런 자들의 일을 사실대로 적고 명분에 따라 꾸짖었으므로, 뒷날 역사에 이름이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무위키 등 일부 매체에서는 ‘적자’를 ‘도둑놈의 자식’으로 풀고, 공자가 《춘추》에 ‘전국 시대’의 반란과 패륜을 기록했다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賊’은 도둑이 아니라 ‘해치다’라는 뜻으로, 앞 구절의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子弒其父)”에 대응한다. 또 《춘추》는 노나라 은공(隱公)에서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까지의 일을 적은 책이므로,[5] 다루는 시기는 전국 시대가 아니라 춘추 시대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공자세가〉도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일을 적으면서 “《춘추》의 뜻이 행해지면 천하의 난신적자가 두려워한다(春秋之義行,則天下亂臣賊子懼焉)”고 썼다.[5] 반고(班固)는 《한서》 〈왕망전(王莽傳)〉의 찬(贊)에서 왕망을 두고 “책에 실린 난신적자와 무도한 사람들 가운데 그 화와 패망을 살펴보면 왕망처럼 심한 자는 없었다(自書傳所載亂臣賊子無道之人,考其禍敗,未有如莽之甚者也)”고 평했다.[6]
당나라 한유(韓愈)는 〈백이송(伯夷頌)〉에서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부끄러워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를 기리며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난신적자들이 뒷세상에 줄줄이 이어졌을 것이다(微二子,亂臣賊子接跡於後世矣)”라고 했다.[7][2]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647년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때 김유신이 하늘에 올린 제문이 실려 있다.
天道則陽剛,而陰柔;人道,則君尊而臣卑。苟或易之,卽為大亂。今,毗曇等以臣而謀君,自下而犯上。此所謂亂臣賊子,人神所同疾,天地所不容。
“하늘의 도는 양이 굳세고 음이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이것이 뒤바뀌면 큰 난리가 됩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 아래에서 위를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김유신은 이어 군사를 독려해 반란군을 쳐부수었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亂臣賊子’가 329건 나온다.[9] 가장 이른 것은 1393년(태조 2) 명나라 홍무제가 조선을 꾸짖은 칙유로, “근래 나라 안에 난신적자가 생겨 올봄에 잡아 멸족했다(邇來,國中或生亂臣賊子,今年春,擒捕族誅)”며 명나라 안의 역모 사건을 언급한 대목이다.[10] 고려 말 정도전(鄭道傳)은 도당에 올린 글에서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벨 수 있다(亂臣賊子。人人所得誅也)”며 춘추의 의리를 내세웠다.[11]
일본에서는 《일본국어대사전》이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1339~1343) 하권의 “난신적자라는 자는 처음에 마음과 말을 삼가지 않는 데서 나온다”를 첫 용례로 든다.[3]
- 내부 기밀을 경쟁사에 팔아넘긴 직원을 두고 동료들은 난신적자나 다름없다며 분노했다.
- 사극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는 “난신적자를 처단하라”는 왕명에 쫓기게 된다.
- 그는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라며, 《춘추》 앞에서 떨었다는 난신적자 이야기를 꺼냈다.
- 같은 ‘난신(亂臣)’이 정반대의 뜻으로 쓰인 예도 있다. 《논어》 〈태백(泰伯)〉에서 무왕은 “나에게는 난신 열 사람이 있다(予有亂臣十人)”고 했는데, 여기서 ‘亂’은 ‘다스리다’라는 뜻이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신하’를 가리킨다. 위(魏)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는 “亂은 다스림이다. 관직을 다스린 사람이 열 사람이다(亂,治也。治官者十人)”라는 마융(馬融)의 풀이를 실었다.[12]
- 루쉰(魯迅)은 1935년 일본어로 쓴 글 〈현대 중국의 공자(在現代中國的孔夫子)〉에서 “공자가 《춘추》를 지어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고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붓으로 단죄당한 난신적자의 이름을 거의 하나도 모른다. 난신적자라고 하면 대개 조조(曹操)를 떠올리는데, 그것은 성인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소설과 희곡을 쓴 이름 없는 작가들이 가르친 것”이라고 꼬집었다.[13]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난신적자”,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2%9C%EC%8B%A0%EC%A0%81%EC%9E%90, 확인날짜=2026-10-01.
- ↑ 2.0 2.1 2.2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수정본 참고 자료 “亂臣賊子”,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7894, 확인날짜=2026-10-01.
- ↑ 3.0 3.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乱臣賊子”,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4%B9%B1%E8%87%A3%E8%B3%8A%E5%AD%90, 확인날짜=2026-10-01.
- ↑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 ↑ 5.0 5.1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
- ↑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99 하 〈왕망전(王莽傳) 하〉.
- ↑ 한유(韓愈), 〈백이송(伯夷頌)〉.
- ↑ 김부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1 〈김유신 열전 상〉.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亂臣賊子”,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0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3일 정묘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aa_10205023_001, 확인날짜=2026-10-01.
- ↑ 정도전(鄭道傳), 〈상도당서(上都堂書)〉, 《삼봉집(三峯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01.
- ↑ 《논어(論語)》 〈태백(泰伯)〉; 하안(何晏), 《논어집해(論語集解)》 〈태백〉 마융 주.
- ↑ 루쉰(魯迅), 〈재현대중국적공부자(在現代中國的孔夫子)〉, 《차개정잡문 2집(且介亭雜文二集)》. 원래 일본어로 써서 1935년 6월 일본 잡지 《개조(改造)》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