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필법
더 많은 작업
춘추필법(春秋筆法)은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春秋)》처럼 비판적이고 엄정하게 쓰는 필법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 방법을 가리킨다.[1]
《춘추》는 노(魯)나라의 연대기를 바탕으로 공자가 엮었다고 전하는 역사서이다. 유가에서는 공자가 사건을 적을 때 글자 하나, 표현 하나를 골라 쓰는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 넣었다고 보았고, 이를 칭찬과 나무람이라는 뜻의 ‘포폄(褒貶)’, 짧은 말에 큰 뜻을 담는다는 ‘미언대의(微言大義)’라고 불렀다. 춘추필법은 이런 서술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방향으로 쓴다. 하나는 권력자의 잘못도 숨기지 않고 곧게 쓰는 엄정한 역사 서술이라는 긍정적인 뜻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을 직접 평가하는 대신 단어 선택이나 생략으로 은근히 칭찬하거나 깎아내리는 서술을 가리키는 뜻으로, 언론 기사나 글의 논조를 비평할 때 흔히 쓴다.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은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흔히 한 글자 한 마디에 칭찬과 나무람의 뜻을 담았으므로, 후세에 글이 곡절이 있으면서 뜻에 포폄을 담은 문장을 ‘춘추필법’이라 한다”고 풀이한다.[2] 일본어에서는 ‘春秋の筆法(しゅんじゅうのひっぽう)’이라고 하며, 뜻이 조금 달라 간접적인 원인을 결과에 곧바로 이어 붙여 엄하게 비판하는 논법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다른 언어의 표현).
‘춘추필법’이라는 네 글자가 옛 경전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는다. 이 말의 근거가 되는 것은 공자가 《춘추》를 지은 뜻과 방식을 전하는 다음 기록들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世衰道微,邪說暴行有作。臣弒其君者有之,子弒其父者有之。孔子懼,作《春秋》。《春秋》,天子之事也。是故孔子曰:『知我者,其惟《春秋》乎!罪我者,其惟《春秋》乎!』
[3] “세상이 쇠하고 도가 희미해져 그릇된 학설과 포악한 행동이 일어났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도 있고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도 있었다. 공자가 이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 《춘추》는 본래 천자가 할 일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일 것이요, 나를 탓하는 것도 오직 《춘추》일 것이다’라고 했다.” 같은 편에서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고 했다.[3]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공자가 “군자는 죽은 뒤에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무엇으로 후세에 나를 드러내겠는가”라며 노나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춘추》를 지었다고 적었다.
約其文辭而指博。故吳楚之君自稱王,而春秋貶之曰「子」;踐土之會實召周天子,而春秋諱之曰「天王狩於河陽」:推此類以繩當世。……至於為春秋,筆則筆,削則削,子夏之徒不能贊一辭。
“글은 간략하게 하되 가리키는 뜻은 넓게 했다. 그래서 오나라와 초나라 임금이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지만 《춘추》는 이를 깎아 ‘자(子)’라고 불렀고, 천토(踐土)의 회맹은 실제로는 주나라 천자를 불러낸 것이었지만 《춘추》는 이를 꺼려 ‘천왕이 하양(河陽)으로 사냥을 갔다’고 적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시를 바로잡았다. …… 《춘추》를 지을 때에는 쓸 것은 쓰고 깎을 것은 깎아서, 자하(子夏) 같은 제자들도 한 마디를 보탤 수 없었다.” 여기서 역사를 쓰고 고치는 일을 가리키는 ‘필삭(筆削)’이라는 말이 나왔다.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도 ‘춘추의 필법’의 유래를 이 대목으로 설명한다.[5]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4년조는 《춘추》의 표현 방식을 이렇게 평했다.
春秋之稱微而顯。志而晦。婉而成章。盡而不汙。懲惡而勸善。非聖人誰能脩之。
[6] “《춘추》의 표현은 말은 적지만 뜻은 드러나고, 사실을 적되 속뜻은 감추어져 있으며, 완곡하면서도 문장을 이루고, 남김없이 다 쓰면서도 굽히지 않으며,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한다. 성인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진(晉)나라 두예(杜預)는 〈춘추경전집해서(春秋經傳集解序)〉에서 이 다섯 구절을 《춘추》 서술의 다섯 가지 체례(五例)로 정리했다.[7]
진(晉)나라의 범녕(范寧)은 〈춘추곡량전서(春秋穀梁傳序)〉에서 “한 글자의 칭찬은 화려한 예복을 내려 주는 것보다 영예롭고, 한 마디의 나무람은 저잣거리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치욕스럽다(一字之褒,寵踰華袞之贈;片言之貶,辱過市朝之撻)”고 했다.[8] 글자 하나로 칭찬과 나무람을 나타낸다는 《춘추》의 이런 서술 방식을 흔히 ‘일자포폄(一字褒貶)’이라고 한다.
경학자들이 춘추필법의 예로 드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 정백극단우언(鄭伯克段于鄢): 은공(隱公) 원년 《춘추》의 경문 “정백이 단을 언에서 이겼다”에 대해 《좌전》은 이렇게 풀이했다. “단(段)이 아우 노릇을 하지 않았으므로 ‘아우’라고 하지 않았고, 두 임금이 싸운 것 같았으므로 ‘이겼다(克)’고 했으며, ‘정백’이라고 부른 것은 형으로서 아우를 가르치지 못한 것을 나무란 것이다(段不弟,故不言弟;如二君,故曰克;稱鄭伯,譏失教也).”[9]
- 공훙(公薨): 은공 11년 은공이 공자 휘(翬, 우보羽父)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했지만, 《춘추》 경문은 “겨울 11월 임진일에 공이 훙(薨)하였다(冬十有一月壬辰,公薨)”라고만 적었다. 《좌전》은 “우보가 자객을 시켜 공을 시해했다(羽父使賊弒公)”고 사실을 밝히고, 경문에 장례를 적지 않은 것은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풀었다.[9] 자기 나라 임금의 시해를 드러내 적지 않는 ‘휘(諱)’의 예이다.
- 천왕수우하양(天王狩于河陽): 앞의 《사기》가 든 예로, 진 문공(晉文公)이 제후를 모아 놓고 주나라 천자를 불러낸 일을 천자가 사냥을 나간 것처럼 적었다.[4]
- 조돈시기군(趙盾弒其君): 선공(宣公) 2년 진(晉)나라 영공(靈公)은 조천(趙穿)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춘추》 경문은 “진나라 조돈(趙盾)이 그 임금 이고(夷皋)를 시해했다(晉趙盾弒其君夷皋)”고 적었다. 《좌전》에 따르면 진나라 태사 동호(董狐)가 먼저 이렇게 적자, 조돈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동호는 “그대는 정경(正卿)으로서 달아나면서 국경을 넘지 않았고, 돌아와서는 역적을 치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인가”라고 답했다. 공자는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쓰는 법이 숨김이 없었다(書法不隱)”고 평했다.[10] 직접 손을 대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결과를 그의 행위로 적은 대표적인 예이다.
- 살(殺)·시(弑)·주(誅)의 구분: 같은 ‘죽임’이라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인 것은 ‘시(弑)’, 죄 있는 자를 벌한 것은 ‘주(誅)’로 구분했다. 《맹자》 〈양혜왕 하〉에서 제 선왕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해도 되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한 사람은 한 사내(一夫)일 뿐이다. 한 사내 주(紂)를 베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聞誅一夫紂矣,未聞弒君也)”고 답한 것도 이런 명분론과 통한다.[11]
이처럼 글자 하나하나에서 포폄을 찾는 해석에 반대한 학자도 있었다. 남송의 주희(朱熹)는 “《춘추》는 그때의 일을 곧바로 적어 당시의 치란과 흥망을 보이려 한 것일 뿐, 한 글자에서 포폄을 정한 것이 아니다(春秋只是直載當時之事,要見當時治亂興衰,非是於一字上定褒貶)”라고 하고, 날짜·작위·이름의 표기에까지 모두 포폄이 깃들었다고 보는 당시의 풀이를 “성인의 뜻은 이렇게 자잘하지 않다(聖人之意只是如此,不解恁地細碎)”며 물리쳤다.[12]
나무위키 등에는 은공이 공자 휘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춘추》가 ‘시해했다(弑)’고 표현했다는 설명이 보이지만, 원문을 확인해 보면 《춘추》 경문은 ‘공훙(公薨)’이라고만 적어 시해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고, 시해를 밝힌 것은 《좌전》의 전문(傳文)이다.[9]
‘춘추필법’이라는 네 글자는 후대의 춘추학 저술과 명청 시기의 문집·소설 평점에서 널리 보인다. 명나라 양영(楊榮)이 새로 부임하는 훈도에게 준 시의 “춘추필법이 밝은 시대에 울린다(春秋筆法鳴昭代)” 같은 구절이 그 예이다.[13]
- 선조 24년(1591) 일본 사신 겐소(玄蘇) 등이 와서 화친을 청하자, 양대박(梁大樸)은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 왜의 사신을 베고 명나라에 알리자고 청했다. 《청계집(靑溪集)》에는 정철이 이 편지를 보고 “이것이 춘추필법이다. 종이 한 장으로 백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此春秋筆法。尺紙能却百萬師者)”라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14]
- 영조 25년(1749) 영조는 유계(兪棨)가 지은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정몽주(鄭夢周)를 죽인 일이 적힌 대목을 두고 “고치려 하면 《춘추》의 필법이 아닐 것 같고, 그냥 두자니 후대의 왕 된 자로서 마음이 편하겠는가(欲改則恐非《春秋》筆法,欲置則爲後王者於心便乎)”라고 고민한 끝에, 이미 간행된 책은 지우지 않되 공양왕 이하의 판본은 태백산 사고에 간직하게 했다.[15] 사실을 곧게 쓰는 필법과 왕실의 체면 사이의 갈등을 보여 주는 예이다.
- 한국고전종합DB 문집 원문에서는 ‘春秋筆法’이 30건 검색된다. 홍여하(洪汝河)는 《목재집(木齋集)》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제목의 책문(策問)을 남겼다.[16]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조선 시대의 역사서들이 공자의 《춘추》를 역사의 절대적 준칙으로 삼아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데 치우치다가 민족의 존재를 잊었고, 중국을 숭상하고 이민족을 배척하다가 끝내 자기 나라까지 깎아내리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또 옛 사서에 시대의 본모습을 그린 글이 드문 까닭을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 내려오는 고기(古記)를 제멋대로 고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7]
일본어의 ‘春秋の筆法’은 사실을 적으면서 가치 판단을 넣는 서술이라는 뜻 외에, 간접적인 원인을 결과에 직접 이어 붙여 엄하게 따지는 논법을 가리키는 뜻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의 먼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곧바로 결과의 책임자로 지목하는 식이다. 앞의 ‘조돈시기군’처럼 직접 손대지 않은 사람에게 결과의 책임을 적어 넣은 《춘추》의 서술에서 이런 뜻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어대사전》은 첫 용례로 가타야마 고손(片山孤村)의 평론 〈호게쓰의 위자연주의(抱月の偽自然主義)〉(1910)의 “춘추의 필법이라면 ‘호게쓰, 덴케이를 주(誅)하다’라고 써야 한다(春秋の筆法なら『抱月天渓を誅す』と書くべきである)”를 든다.[5]
| 한자 | 음 | 기본 의미 | 성어 안의 의미 |
|---|---|---|---|
| 春 | 춘 | 봄 | 《춘추》의 첫 글자 |
| 秋 | 추 | 가을 | 《춘추》의 둘째 글자 |
| 筆 | 필 | 붓, 쓰다 | 글을 쓰는 |
| 法 | 법 | 법, 방법 | 방식 |
‘춘추’는 한 해를 봄·가을로 줄여 부른 말로, 연대기를 뜻한다.
- 장애 보고서에 ‘일부 사용자에게 일시적 지연’이라고만 적은 것은 전면 장애를 감춘 일종의 춘추필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 그는 권력자의 허물도 숨기지 않는 춘추필법으로 당대사를 기록했다.
- 기사 제목의 단어 하나에 기자의 속뜻을 담은 춘추필법이 엿보인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춘추필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B6%98%EC%B6%94%ED%95%84%EB%B2%95, 확인날짜=2026-09-27.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春秋筆法”,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6841, 확인날짜=2026-09-27.
- ↑ 3.0 3.1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 ↑ 4.0 4.1 4.2 사마천, 《사기》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
- ↑ 5.0 5.1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 “春秋の筆法”,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98%A5%E7%A7%8B%E3%81%AE%E7%AD%86%E6%B3%95, 확인날짜=2026-09-27.
-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4년.
- ↑ 두예(杜預), 〈춘추경전집해서(春秋經傳集解序)〉.
- ↑ 범녕(范寧), 〈춘추곡량전서(春秋穀梁傳序)〉.
- ↑ 9.0 9.1 9.2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원년·11년.
-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2년.
-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83 〈춘추(春秋)·강령(綱領)〉.
- ↑ 양영(楊榮), 〈송호훈도지신감(送胡訓導之新淦)〉, 《양문민집(楊文敏集)》 권6.
- ↑ 양대박, 〈청참왜사서 상송강정상국(請斬倭使書 上松江鄭相國)〉, 《청계집(靑溪集)》 권3,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09-27.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5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ua_12505019_002, 확인날짜=2026-09-27.
- ↑ 홍여하, 〈책제(策題)〉, 《목재집(木齋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09-27.
- ↑ 신채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1편 총론, 중부대학교 공개본, https://cris.joongbu.ac.kr/download/%EC%A1%B0%EC%84%A0%EC%83%81%EA%B3%A0%EC%82%AC-%EC%8B%A0%EC%B1%84%ED%98%B8.pdf, 확인날짜=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