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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여대(男負女戴)는 남자는 짐을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인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負(부)’는 등에 지는 것, ‘戴(대)’는 머리에 이는 것이다. 남자는 지게나 등짐을 지고 여자는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줄지어 길을 가는 모습에서, 난리나 흉년으로 살림을 챙겨 고향을 떠나는 피란민·유랑민의 행렬을 가리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전쟁 피란민이나 재해 이재민의 행렬을 묘사할 때 쓴다.

특정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 아니며, 주로 한국 문헌에서 쓰인 말이다. 옛 한문 전적에서 이 네 글자는 조선 시대의 실록·《승정원일기》·문집에서만 확인되고, 중국 문헌 용례는 확인되지 않는다.[2] 대만 교육부 《성어전》과 일본의 주요 사전에도 표제어로 실려 있지 않다. 중국어에서는 비슷한 장면을 ‘부로휴유(扶老攜幼,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끎)’, ‘타남대녀(拖男帶女, 자식들을 이끌고 다님)’ 같은 말로 나타낸다.[3]

조선 문헌의 용례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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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나르는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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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헌에서 남부여대는 떠돌이 행렬보다 먼저, 관청이 시키는 운반 부역에 시달리는 백성의 모습을 그리는 말로 많이 쓰였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22건이 있다.[4]

  • 가장 이른 것은 연산군 6년(1500) 성준(成俊)의 계로, 함경도에서 진상품을 역마로 실어 나르다가 말이 모자라면 소를 쓰고, 소도 모자라면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어도 감당하지 못해 그 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牛畜不足,則男負女戴,猶不能支,其苦不可勝言)”고 했다.[5]
  • 선조 21년(1588) 사헌부는 한양 네 산의 마른 소나무를 베어 염초(鹽焇)를 달일 때 관리들이 친구들에게 벌채 허가증을 내주어 “남부여대하는 행렬이 길에 줄을 이었다(男負女戴,絡繹道路)”며 담당 관원들의 파직을 청했다.[6]
  • 임진왜란 중인 1592년 류성룡(柳成龍)은 머물러 있는 군사들이 날마다 먹는 양식을 대느라 백성이 “남부여대하여 길에 줄을 잇는데도 한 도의 힘에 털끝만큼의 여유도 없다(男負女戴。連絡道路。而一道事力。無復有毫髮之餘)”고 했다.[7]
  • 윤선도(尹善道)는 산성에 쌓아 둔 곡식을 봄가을로 나누어 주고 거두어들이느라 주변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하여 산을 기어오르고 고개를 넘는다(男負女戴。爬山越嶺)”며 산성의 폐단을 지적했다.[8]

흉년에 고향을 떠나는 유민의 모습을 그린 용례도 있다. 조익(趙翼)은 쌀값이 폭등한 해에 “길에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것을 이끌며 남부여대하여 대여섯 명, 여남은 명씩 떠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道路見携幼扶老。男負女戴。或五六名。或十餘名。流去者相屬)”고 호조 판서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9]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는 이쪽의 쓰임을 따른 것이다.[1]

글자 그대로의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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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전 박천(博川)에서 본 광경을 적었다. 남부여대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가는데 흉년에 떠도는 사람들 같아 물어보니 성천(成川)의 금광으로 금을 캐러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10] 순조 7년(1807) 《논어》 주강에서는 특진관 김이영(金履永)이 “군사·식량·믿음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리겠느냐”는 순조의 물음에 답하며, 장판(長坂) 싸움 때 강릉(江陵)의 사졸 십여만이 “남부여대하여 배반하지 않고 따라온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비(劉備)를 따라 피란하던 무리를 이 말로 그린 것이다.[11]

비슷한 옛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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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지고 여자가 이는 모습 자체는 중국 고전에도 나온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권2 〈현명전(賢明傳)〉의 ‘초접여처(楚接輿妻)’ 조에서, 초나라 왕이 은자 접여(接輿)를 벼슬에 부르자 그 아내는 거절하면 불충이고 따르면 불의이니 떠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에 “남편은 솥과 시루를 지고 아내는 길쌈 도구를 이고, 이름과 성을 바꾸어 멀리 옮겨 가니 아무도 간 곳을 알지 못했다(夫負釜甑,妻戴紝器,變名易姓而遠徙,莫知所之)”.[12] 부부가 세속을 피해 함께 숨어 사는 이야기여서, 짐을 지고 인 모습은 같지만 남부여대와는 뜻이 다르다.

조선 후기의 송문흠(宋文欽)도 여인의 머리 모양을 논하는 글에서 “옛날 남자가 지고 여자가 이는 일은 경전에 많이 보인다(古者男負女戴。見於經傳者多矣)”고 했다.[13]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男 남 사내 남자는
負 부 지다 등에 지다
女 여 계집 여자는
戴 대 이다 머리에 이다
  • 6·25 전쟁 때 남부여대한 피란민의 행렬이 한강 다리로 몰려들었다.
  • 지진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남부여대하고 임시 대피소로 향하는 모습이 뉴스로 전해졌다.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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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리걸식(流離乞食):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음.
  • 부로휴유(扶老攜幼):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이끎. 온 식구가 함께 길을 나섬.
  • 동분서주(東奔西走):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님.
  •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정처 없이 떠돌며 얻어먹고 지냄.
  1. ↑ 1.0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남부여대”,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2%A8%EB%B6%80%EC%97%AC%EB%8C%80, 확인날짜=2026-09-27.
  2.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男負女戴”,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09-27.
  3.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拖男帶女”,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22713, 확인날짜=2026-09-27.
  4.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男負女戴”,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09-27.
  5.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6권, 연산 6년 1월 26일 신사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ja_10601026_001, 확인날짜=2026-09-27.
  6.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3월 1일 갑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103001_001, 확인날짜=2026-09-27.
  7.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유성룡, 《서애집(西厓集)》 권5, 〈진시무차(陳時務箚)〉, 자료ID ITKC_MO_0224A_0050_010_0020,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224A_0050_010_0020, 확인날짜=2026-09-27.
  8.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윤선도, 《고산유고(孤山遺稿)》 권2, 〈시폐사조소(時弊四條疏)〉, 자료ID ITKC_MO_0332A_0020_010_0150,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332A_0020_010_0150, 확인날짜=2026-09-27.
  9.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조익, 《포저집(浦渚集)》 권16, 〈여호판원평원두표연성이시방완남이후원서(與戶判原平元斗杓延城李時昉完南李厚源書)〉, 자료ID ITKC_MO_0321A_0160_010_0100,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321A_0160_010_0100, 확인날짜=2026-09-27.
  10. ↑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11.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0권, 순조 7년 11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wa_10711021_001, 확인날짜=2026-09-27.
  12. ↑ 유향(劉向), 《열녀전(列女傳)》 권2 〈현명전(賢明傳)·초접여처(楚接輿妻)〉.
  13. ↑ 송문흠(宋文欽), 《한정당집(閒靜堂集)》 권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