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이도령
더 많은 작업
엄이도령(掩耳盜鈴)은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친다는 뜻으로, 모두가 그 잘못을 다 알고 있는데도 얕은꾀로 남을 속이려 드는 것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실린 우화에서 나왔으며, 원래 이야기에서 훔친 것은 방울이 아니라 종(鐘)이어서 ‘엄이도종(掩耳盜鐘)’이라고도 한다.
자기 귀만 막으면 남도 듣지 못하리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비웃는 말이다. 뻔히 드러날 잘못을 감추려고 눈속임을 하거나, 비판을 듣지 않으려고 스스로 귀를 닫는 태도를 꼬집을 때 쓴다. 우리 속담 ‘눈 가리고 아웅’과 뜻이 통한다.
중국어에서도 ‘掩耳盜鈴(yǎn ěr dào líng)’으로 널리 쓴다.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이 말이 “남을 속이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일 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풀이하고, ‘자기기인(自欺欺人)’과 비교해 엄이도령은 자기만 속을 뿐 실제로는 남을 속이지 못한다는 반어적 풍자에 무게가 있다고 설명한다.[2] 일본어에서는 ‘耳を掩いて鐘を盗む(귀를 가리고 종을 훔친다)’라는 말로 쓰며, 《디지털 대사천》은 양심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서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또는 제 딴에는 감췄다고 여겨도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을 비유한다고 풀이한다. ‘耳を掩いて鈴を盗む’도 같은 말로 올라 있다.[3]
《여씨춘추》 권24 〈불구론(不苟論)〉의 〈자지(自知)〉 편에 실린 이야기이다. 이 편은 군주가 스스로를 알려면 곧은 말을 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스스로를 알지 못해 망한 군주들을 늘어놓은 뒤 다음 비유를 든다.
范氏之亡也,百姓有得鍾者,欲負而走,則鍾大不可負,以椎毀之,鍾況然有音,恐人聞之而奪己也,遽揜其耳。惡人聞之可也,惡己自聞之悖矣。為人主而惡聞其過,非猶此也?惡人聞其過尚猶可。
“범씨(范氏)가 망했을 때 백성 가운데 종을 얻은 자가 있었다. 지고 달아나려 했으나 종이 커서 질 수가 없었다. 망치로 깨뜨리니 종이 ‘쾅’ 하고 울렸다. 남이 듣고 빼앗아 갈까 두려워 얼른 제 귀를 막았다. 남이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그럴 수 있지만, 제가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어그러진 일이다. 임금이 되어 자기 허물을 듣기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지 않은가? 남이 자기 허물을 듣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그래도 봐줄 만하다.”[4]
범씨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유력한 경(卿) 가문이다. 원문에서 ‘鍾’은 ‘鐘’과 같은 글자이고, ‘揜’은 ‘掩’과 통한다.[2] 곧 이 이야기의 과녁은 좀도둑이 아니라 허물을 지적받기 싫어하는 임금이다.
나무위키 등에는 도둑이 종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잡혔다는 결말이 붙어 소개되는 경우가 있으나, 원문은 도둑이 귀를 막았다는 데서 끝나고 곧바로 임금에 대한 평으로 넘어간다.[4]
같은 이야기가 《회남자(淮南子)》 〈설산훈(說山訓)〉에도 짧게 실려 있다. “범씨가 무너졌을 때 그 종을 훔쳐 지고 달아나는 자가 있었는데, 쨍 하고 소리가 나자 남이 들을까 두려워 얼른 제 귀를 막았다(范氏之敗,有竊其鐘,負而走者,鎗然有聲,懼人聞之,遽掩其耳)”는 것으로, 여기서는 종을 ‘훔쳤다(竊)’고 분명히 적었다.[5]
네 글자로 굳기 전후의 형태는 오랫동안 ‘종’이었다. 《성어전》은 북제 유주(劉晝)의 《유자(劉子)》 〈신독(愼獨)〉에 ‘도종엄이(盜鐘掩耳)’가 쓰였다고 소개한다.[2] 당나라 온대아(溫大雅)의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 권1에는 617년 이연(李淵, 뒤의 당 고조)이 수 양제를 폐하고 대왕(代王)을 세우자는 배적(裴寂) 등의 건의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귀를 막고 종을 훔치는 격이라 할 만하다(如此所作,可謂掩耳盜鐘)”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장면이 《자치통감》 권184에도 실렸다.[6][7] 당나라 유지기(劉知幾)도 《사통(史通)》 〈서지(書志)〉에서 억지로 끼워 맞춘 역사 서술을 두고 “귀를 막고 종을 훔치며 스스로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掩耳盜鐘,自云無覺)”고 비판했다.[8]
방울(鈴)로 바뀐 형태도 당나라 때 이미 보인다. 화엄종 승려 징관(澄觀)의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권34에는 허물을 덮어 감추는 번뇌(覆)를 풀이하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쳐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다(若掩耳偷鈴,欲人不聞故)”는 구절이 있다.[9] 북송의 선승 설두 중현(雪竇重顯)은 두 선사의 문답을 두고 “두 도둑이 귀 막고 방울 훔칠 줄만 안다(只解掩耳偷鈴)”고 평했고, 이 말이 《벽암록(碧巖錄)》 권9에 실려 선종에서 널리 쓰였다.[10] 《성어전》은 ‘掩耳盜鈴’ 네 글자의 용례로 명나라 심덕부(沈德符)의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과 《홍루몽》 제9회, 《경화연(鏡花緣)》 제14회를 든다.[2]
- 유출 사고를 공지하지 않고 게시판 댓글만 막는다고 소문이 잦아들 리 없다. 엄이도령일 뿐이다.
- 보안 점검 보고서에서 취약점 항목만 지워 버린 것은 엄이도령 격이다.
-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는 기사만 탓하는 것은 엄이도령과 다를 바 없다.
- 엄이도종(掩耳盜鐘), 엄이투령(掩耳偷鈴), 도종엄이(盜鐘掩耳), 색이투령(塞耳偷鈴), 색이도종(塞耳盜鐘), 절령엄이(竊鈴掩耳), 절종엄이(竊鐘掩耳): 같은 뜻의 다른 형태. 《성어전》은 색이도종의 예로 《위서(魏書)》 〈이주영전(尒朱榮傳)〉, 절종엄이의 예로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절령엄이의 예로 북송 유창(劉敞)의 《공시선생제자기(公是先生弟子記)》를 든다.[2]
- 자기기인(自欺欺人):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임.[2]
- 엄목포작(掩目捕雀):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다는 뜻으로, 얕은꾀로 남을 속이려 함.[2]
- 속담: 눈 가리고 아웅
- 격화소양(隔靴搔癢), 미봉책(彌縫策):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대응이라는 점에서 함께 쓰인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엄이도령”,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97%84%EC%9D%B4%EB%8F%84%EB%A0%B9, 확인날짜=2026-09-28.
- ↑ 2.0 2.1 2.2 2.3 2.4 2.5 2.6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掩耳盜鈴”,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2, 확인날짜=2026-09-28.
- ↑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 “耳を掩いて鐘を盗む”,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80%B3%E3%82%92%E6%8E%A9%E3%81%84%E3%81%A6%E9%90%98%E3%82%92%E7%9B%97%E3%82%80, 확인날짜=2026-09-28.
- ↑ 4.0 4.1 《여씨춘추(呂氏春秋)》 권24 〈불구론(不苟論)〉 〈자지(自知)〉.
- ↑ 《회남자(淮南子)》 〈설산훈(說山訓)〉.
- ↑ 온대아(溫大雅),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 권1.
- ↑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4 〈수기(隋紀) 8〉.
- ↑ 유지기(劉知幾), 《사통(史通)》 권3 〈서지(書志)〉.
- ↑ 징관(澄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34, CBETA T1736, https://cbetaonline.dila.edu.tw/T1736_034, 확인날짜=2026-09-28.
- ↑ 원오 극근(圜悟克勤), 《벽암록(碧巖錄)》 권9.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掩耳盜鈴”,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9일 기해 1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611119_012, 확인날짜=2026-09-28.
- ↑ 김령(金坽), 〈답이중명(答李仲明)〉, 《계암집(溪巖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318A_0050_010_0030,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318A_0050_010_0030, 확인날짜=2026-09-28.
- ↑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 ‘엄이도종’”, 경향신문, 2011-12-18, https://www.khan.co.kr/article/201112181028191,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2월 20일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za_14212020_003, 확인날짜=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