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우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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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지독(老牛舐犢)은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준다는 뜻으로,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깊은 사랑을 비유하는 한자성어이다.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늙은 소가 송아지를 아끼는 것으로, 사람이 자녀를 사사로이 사랑함을 비유한다”고 풀이한다.[1]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 네 글자 대신 같은 고사에서 나온 ‘지독지정(舐犢之情)’과 ‘지독지애(舐犢之愛)’가 올라 있다.[2]
《후한서(後漢書)》 권54 〈양진열전(楊震列傳)〉에 딸린 양표전에 나온다. 양표의 집안은 양진(楊震)부터 양표까지 4대에 걸쳐 태위를 낸 명문이었다.[4] 양표는 한나라의 운수가 다해 가는 것을 보고 다리가 오그라드는 병을 핑계로 걷지 않은 채 10년을 지냈다. 그 뒤 아들 양수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後子修為曹操所殺,操見彪問曰:「公何瘦之甚?」對曰:「愧無日磾先見之明,猶懷老牛舐犢之愛。」操為之改容。
“뒤에 아들 양수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양표를 보고 ‘공은 어찌 그리 여위었소?’ 하고 묻자, 양표는 ‘김일제와 같은 앞을 내다보는 밝음이 없었음이 부끄러운데, 그래도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사랑을 품고 있어서입니다’라고 답했다. 조조는 그 말에 얼굴빛을 고쳤다.”
김일제(金日磾)는 한 무제의 신하로, 무제가 귀여워하던 자기 아들이 자라서 궁녀와 희롱하는 것을 보고 그 음란함을 미워해 직접 죽였다.[4] 양표는 아들이 화를 입을 것을 미리 알고 막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을 이 말에 담았다. 이 대목에서 ‘선견지명’이라는 말이 함께 나왔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432는 같은 이야기를 사승(謝承)의 《후한서》에서 인용했는데, 여기에는 양표의 아들 이름이 ‘修’가 아니라 ‘循’으로 적혀 있다.[5]
《후한서》에 따르면 양수는 재주가 뛰어나 조조의 주부로 일했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한 뒤 유비를 치지도 못하고 지키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계륵(雞肋)”이라는 교령만 내리자, 양수만이 “닭갈비는 먹자니 얻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다. 공께서 돌아가기로 마음먹으셨다”고 알아차렸고, 조조는 이때 군사를 돌렸다. 그 뒤 양수가 조조의 물음에 미리 답을 적어 두고 나가는 일이 여러 번 드러나자 조조는 그를 꺼리게 되었고, 그가 원술(袁術)의 생질이어서 후환이 될 것도 걱정해 “일을 핑계로 죽였다(遂因事殺之)”.[4] 이현(李賢)의 주석이 인용한 《속한서(續漢書)》는 양수가 조식(曹植)과 술에 취해 함께 수레를 타고 사마문(司馬門)을 나서 조창(曹彰)을 비방했다는 말을 조조가 듣고 크게 노해 죽였으며, 그때 나이가 마흔다섯이었다고 전한다.[4]
나무위키 등 일부 매체에서는 조조가 계륵의 뜻을 알아챈 양수를 군심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그 자리에서 베고, 제갈량이 양수의 죽음을 두고 시를 지었다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삼국지연의》 제72회의 줄거리이며, 연의에서도 시는 “뒷사람이 시를 지었다(後人有詩曰)”고 되어 있고 끝 구절은 “몸이 죽은 것은 재주 탓이지 군사를 물리려 한 탓이 아니다(身死因才誤,非關欲退兵)”이다.[6] 《후한서》에는 계륵 일로 양수를 죽였다는 기록이 없고, 조조가 군사를 돌린 뒤 다른 일로 죽였다고 되어 있다.
처음에는 자식 잃은 슬픔을 드러내는 말이었고, 당나라 때에는 자식이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부모의 마음을 나타내는 데도 쓰였다. 영호초(令狐楚)가 지은 사은장에는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다(老牛舐犢之心,喜無終極)”는 구절이 있다.[7] 당나라 성현영(成玄英)은 《장자》의 “어버이를 잊기는 쉬워도 어버이가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忘親易,使親忘我難)”는 구절을 풀면서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듯 은혜와 사랑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 만물의 본성이므로, 자식이 어버이를 잊기는 쉬워도 어버이가 자식을 잊기는 어렵다”고 했다.[8]
한편 송나라 때부터는 자식을 감싸기만 하는 사사로운 사랑을 꼬집는 뜻으로도 쓰였다. 사마광(司馬光)의 《잠허(潛虛)》는 아버지의 도리를 말하면서 “사랑하되 가르치지 않으면 높임의 뜻을 잃는다(慈而不訓,失尊之義)”고 하고,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것은 제비가 새끼를 이끄는 것만 못하다(老牛舐犢,不如燕引其雛)”고 했다.[9] 남송의 악가(岳珂)가 지은 《정사(桯史)》 권13에는 진회(秦檜)가 죽은 뒤 임진언(任盡言)이 새 시어사에게 보낸 축하 편지가 실려 있는데, 진회가 제 집안 아이를 과거에서 연달아 수석으로 뽑게 한 일을 두고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으니 자식 사랑하지 않는 이 누구랴마는, 들새를 난새라 하니 임금을 속임이 심하다(老牛舐犢,愛子誰無?野鳥爲鸞,欺君實甚)”고 비꼬았다.[10] 청나라 조길사(趙吉士)의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 권12에는 만력 경진년(1580) 장거정(張居正)의 아들 장무수(張懋修)가 장원 급제하자 누군가 이 네 구절을 적은 쪽지를 급보 봉투에 넣어 보냈고, 장거정이 크게 노해 보낸 사람을 찾았으나 이미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책은 이 네 구절이 “송나라 사람이 진회를 풍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11]
현대 중국어에서는 부모의 깊은 사랑을 나타낼 때 흔히 ‘지독정심(舐犢情深)’이라고 한다.[12] 일본어의 ‘舐犢の愛(しとくのあい)’는 사전 뜻풀이가 “부모가 자식을 지나치게 귀여워함, 익애(溺愛)”이며, 《일본국어대사전》은 첫 용례로 사토 하루오(佐藤春夫)의 《도회의 우울(都会の憂鬱)》(1923)을 든다.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은 고사에서는 부모의 사랑을 좋게 보았지만 뒤에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3]
- 최치원(崔致遠)은 〈지증대사비명(智證大師碑銘)〉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출가시키게 된 일을 “송아지 핥던 이로 하여금 사랑을 끊게 했다(使䑛犢者割愛)”고 적었다.[13]
- 이색(李穡)이 공민왕 사후 왕대비의 이름으로 명나라에 올린 진정표에는 “하물며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이겠습니까(况老牛䑛犢之情乎)”라는 구절이 있다.[14]
- 문종 1년(1451) 여든아홉 살의 치사 영의정 황희(黃喜)는 11년 전 장죄로 직첩을 빼앗긴 둘째 아들 황보신(黃保身)의 직첩을 돌려 달라고 청하면서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으로 어리석은 신의 평생 근심을 풀지 못했다(玆以老牛舐犢之情,未解愚臣終身之悶)”고 했고, 문종은 대신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이를 들어주었다.[15]
-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만 하는 것은 노우지독의 정일지언정 참된 사랑이라 하기 어렵다.
- 입사 첫날 딸의 노트북 보안 설정까지 챙겨 주는 아버지를 보며 동료들은 노우지독이라며 웃었다.
- 늙은 어머니는 노우지독의 마음으로 멀리 떠나는 아들의 짐을 몇 번이고 다시 꾸렸다.
-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老牛舐犢”,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7623, 확인날짜=2026-09-30.
- ↑ 2.0 2.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지독지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A7%80%EB%8F%85%EC%A7%80%EC%A0%95, 확인날짜=2026-09-30.
- ↑ 3.0 3.1 3.2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 “舐犢の愛”,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88%90%E7%8A%A2%E3%81%AE%E6%84%9B, 확인날짜=2026-09-30.
- ↑ 4.0 4.1 4.2 4.3 4.4 《후한서(後漢書)》 권54 〈양진열전(楊震列傳)〉.
- ↑ 《태평어람(太平御覽)》 권432 〈인사부(人事部) 73·자애(慈愛)〉, 사승(謝承) 《후한서》 인용.
- ↑ 나관중,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72회.
- ↑ 영호초(令狐楚), 〈대이복야사자은사장(代李僕射謝子恩賜狀)〉, 《전당문(全唐文)》 권541.
- ↑ 성현영(成玄英), 《남화진경주소(南華真經註疏)》 〈천운(天運)〉 소(疏).
- ↑ 사마광(司馬光), 《잠허(潛虛)》.
- ↑ 악가(岳珂), 《정사(桯史)》 권13 〈임원수계(任元受啓)〉.
- ↑ 조길사(趙吉士),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 권12, 《임거만고(林居漫稿)》 인용.
- ↑ 대만 교육부 《성어전》 2020, “舐犢情深”,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7730, 확인날짜=2026-09-30.
- ↑ 최치원(崔致遠),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 《고운집(孤雲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ITKC_MO_0002A_0060_010_0020,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09-30.
- ↑ 이색(李穡), 〈왕대비진정표(王大妃陳情表)〉, 《목은고(牧隱藁)》,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ITKC_MO_0020A_0530_010_0130,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09-30. 《고려사》 권134에도 실려 있다.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2월 2일 7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ea_10102002_007, 확인날짜=2026-09-30.
- ↑ 홍매(洪邁), 《용재수필(容齋隨筆)》 권12 〈조조살양수(曹操殺楊脩)〉.
- ↑ 정등길(程登吉), 《유학경림(幼學瓊林)》 권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