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형청죄
더 많은 작업
부형청죄(負荊請罪)는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 찾아가 벌을 청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구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장수 염파(廉頗)가 재상 인상여(藺相如)에게 사죄한 고사에서 나왔다.[1]
‘형(荊)’은 가시나무, 또는 그 가지로 만든 형장(刑杖)이다. 웃통을 벗고 형장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은 “이것으로 나를 때려 달라”는 뜻을 몸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공개적으로 깊이 사과하는 일, 특히 자존심을 굽히고 먼저 찾아가 사과하는 일을 이를 때 쓴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에는 ‘부형청죄’가 올라 있지 않고, 원전의 표현을 딴 ‘육단부형(肉袒負荊)’이 “윗옷 한쪽을 벗고 등에 형장을 지고 간다는 뜻으로, 형장으로 맞아 사죄하겠다는 뜻을 나타냄”으로 올라 있다.[2] 중국어에서는 같은 한자로 널리 쓰며(간체 负荆请罪), 《성어전》은 비슷한 말로 ‘육단견양(肉袒牽羊)’을 든다.[1]
《사기(史記)》 권8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온다.[3] 인상여는 화씨벽을 온전히 지켜 돌아오고(완벽귀조), 민지(澠池)의 회맹에서 진나라 왕에게 맞서 조나라의 체면을 지킨 공으로 상경(上卿)이 되어 지위가 염파보다 높아졌다. 염파는 “나는 성을 치고 들에서 싸운 큰 공이 있는데, 인상여는 혀를 놀린 수고만으로 내 위에 있다”며 만나면 욕을 보이겠다고 떠벌렸다. 인상여는 조회 때마다 병을 핑계 대고, 길에서 염파를 보면 수레를 돌려 피했다. 부끄럽게 여긴 식객들에게 인상여는 “강한 진나라가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두 호랑이가 싸우면 둘 다 살 수 없다. 나는 나라의 급한 일을 앞세우고 사사로운 원한을 뒤로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廉頗聞之,肉袒負荊,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曰:「鄙賤之人,不知將軍寬之至此也。」卒相與驩,爲刎頸之交。
“염파는 이 말을 듣고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매를 지고 빈객을 통해 인상여의 집 문 앞에 가서 사죄했다. ‘비천한 사람이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기꺼이 화해하고 문경지교를 맺었다.”[3]
원문의 표현은 ‘육단부형(肉袒負荊)’과 ‘사죄(謝罪)’이며, ‘負荊請罪’ 네 글자는 《사기》에 나오지 않는다.[3] 나무위키 등에서는 인상여가 이때 ‘상방(相邦)’에 임명되었다고 하거나 염파가 “벌을 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원문에서 인상여가 받은 자리는 상경이며 염파의 말은 위의 한마디뿐이다.[3]
‘負荊’과 ‘請罪’가 이어진 형태는 당나라 때 보인다. 이백(李白)은 안주(安州)의 장사 이씨에게 길에서 무례를 저지른 일을 사과하는 편지 〈상안주이장사서(上安州李長史書)〉에서 “감히 가시나무를 지고 문하에 죄를 청한다(敢昧負荊請罪門下)”고 썼다.[4][1] 원나라 고문수(高文秀)의 잡극 《민지회(澠池會)》 제4절에는 염파가 직접 “염파가 잘못이 많았으니 오늘 문을 두드려 부형청죄한다(廉頗多有差遲,今日叩門負荊請罪)”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 이 무렵에는 염파 고사를 가리키는 성어로 굳었음을 알 수 있다.[1]
《수호전》 제73회에는 이 행동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송강을 오해해 충의당의 깃발을 찍어 넘긴 이규(李逵)가 차라리 목을 베겠다고 하자, 연청(燕青)이 “부형청죄라는 법이 있다”며 “스스로 옷을 벗고 삼끈으로 몸을 묶고 등에 가시나무 매를 지고 충의당 앞에 엎드려 ‘형님 마음대로 때리십시오’라고 하면 형님이 차마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 준다.[5]
- 범수의 석고청죄: 진(秦)나라 재상 범수(范雎)는 자신이 천거한 정안평(鄭安平)이 조나라에 군사 2만을 이끌고 항복하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죄를 청했다(席槁請罪). 진나라 법은 천거한 사람도 같은 죄로 다스렸지만, 소왕은 이 일을 입에 올리는 자를 처벌하겠다며 범수를 감쌌다.[6] 조선에서 신하가 거적을 깔고 처분을 기다리던 석고대죄(席藁待罪)와 같은 계열이다.
- 미축의 면박청죄: 촉한의 미축(麋竺)은 아우 미방(糜芳)이 오나라에 항복해 관우가 패망하자 스스로 몸을 묶고 유비에게 죄를 청했다(面縛請罪). 유비는 형제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는다며 이전처럼 대했으나, 미축은 부끄러움과 분함으로 병을 얻어 한 해 남짓 만에 죽었다.[7]
- 《삼국지연의》 제90회에서는 일곱 번째로 사로잡힌 맹획이 일족과 함께 “웃통을 벗고 사죄(肉袒謝罪)”하는 장면이 나온다(칠종칠금).[8]
-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이이(李珥)의 편지에는 “내 이치가 굽었다면 비록 세 자 어린아이라도 나에게 이마를 땅에 대고 가시나무를 지게(泥首負荊) 한다면 달게 따르겠다”는 구절이 있다.[9]
- 인조 3년(1625) 연평부원군 이귀(李貴)는 반정 동지인 김류(金瑬)의 허물을 임금 앞에서 들추었던 일을 뉘우치며 “신이 물러가 가시나무를 지고 사과하겠습니다(臣當退去, 負荊以謝)”라고 했다. 인조는 앞서 두 사람의 결의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며 화합하기를 바란다고 했다.[10] 염파와 인상여처럼 다툰 공신 사이의 화해를 이 고사로 말한 것이다.
-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낸 회사 대표가 피해자들 앞에 나와 부형청죄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회의에서 동료를 몰아세운 것이 마음에 걸려 다음 날 부형청죄하는 마음으로 먼저 찾아갔다.
- ↑ 1.0 1.1 1.2 1.3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負荊請罪”,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46, 확인날짜=2026-10-03.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육단부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9C%A1%EB%8B%A8%EB%B6%80%ED%98%95, 확인날짜=2026-10-03.
- ↑ 3.0 3.1 3.2 3.3 사마천,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 ↑ 이백(李白), 〈상안주이장사서(上安州李長史書)〉. 대만 교육부 《성어전》도 첫 서증으로 든다.
- ↑ 시내암(施耐庵), 《수호전(水滸傳)》 120회본 제73회.
- ↑ 사마천, 《사기》 권79 〈범수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 ↑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38 〈촉서(蜀書)·미축전(麋竺傳)〉.
- ↑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90회.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20년 3월 1일 경인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b_12003001_001, 확인날짜=2026-10-03.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0권, 인조 3년 9월 28일 계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pa_10309028_001, 확인날짜=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