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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은 화씨(和氏)의 구슬이라는 뜻으로, 천하의 명옥(名玉), 나아가 더없이 귀한 보배를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돌을 바치다가 두 발을 잘린 끝에 그 가치를 인정받은 고사에서 나왔다.

줄여서 ‘화씨벽(和氏璧)’, ‘화벽(和璧)’이라고도 한다.[2] 뒤에 진(秦)나라 소왕이 성 열다섯 개와 바꾸자고 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연성벽(連城璧)’이라고도 부른다.[3] ‘璧’은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둥글넓적한 옥이다.

오늘날에는 아주 귀한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3] 다만 이 이야기를 처음 전한 《한비자》의 본뜻은 보배 자체보다, 진가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 고초를 겪는 인재에 대한 탄식에 있었다(아래 ‘출전’). 이 구슬을 진나라에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지켜 돌아온 인상여의 이야기에서 완벽(完璧)과 완벽귀조(完璧歸趙)가 나왔다.

일본어에서도 ‘和氏の璧(かしのたま)’라고 하며 같은 뜻으로 쓴다.[3]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和 화 화하다 변화(卞和)의 이름 ‘화’
氏 씨 성씨, 씨 이름 뒤에 붙여 그 사람을 가리키는 말
之 지 가다, ~의 ~의
璧 벽 둥근 옥 구슬, 옥

《한비자》 〈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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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첫머리에 나온다.[4]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奉而獻之厲王。厲王使玉人相之。玉人曰:「石也。」王以和爲誑,而刖其左足。及厲王薨,武王即位。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武王使玉人相之。又曰:「石也。」王又以和爲誑,而刖其右足。武王薨,文王即位。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三日三夜,淚盡而繼之以血。王聞之,使人問其故,曰:「天下之刖者多矣,子奚哭之悲也?」和曰:「吾非悲刖也,悲夫寶玉而題之以石,貞士而名之以誑,此吾所以悲也。」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遂命曰「和氏之璧」。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얻어 여왕(厲王)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장이에게 감정하게 하니 옥장이가 ‘돌입니다’ 하였다. 왕은 화가 속였다고 여겨 그의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가 다시 옥돌을 받들어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장이에게 감정하게 하니 또 ‘돌입니다’ 하였다. 왕은 또 화가 속였다고 여겨 그의 오른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는 옥돌을 끌어안고 초산 아래에서 사흘 밤낮을 울어, 눈물이 다하자 피가 이어 흘렀다. 왕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잘린 사람이 많은데 그대는 어찌 그리 슬피 우는가?’ 화가 말했다. ‘저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거짓말쟁이라 하니 이것이 슬픈 것입니다.’ 왕이 옥장이를 시켜 옥돌을 다듬게 하니 보배가 나왔다. 마침내 이름하여 ‘화씨의 구슬’이라 하였다.”[4]

한비자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보옥 자체가 아니라 법술(法術)을 아는 선비의 처지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어서 “구슬과 옥은 임금이 급히 원하는 것인데도 두 발이 잘린 뒤에야 보배로 인정되었으니 보배를 알아보기가 이처럼 어렵다. 지금 임금에게 법술은 화씨의 구슬만큼 급한 것도 아니다(今人主之於法術也,未必和璧之急也)”라고 하여, 법술의 선비가 죽음을 무릅써도 그 도가 인정받기 어렵다고 탄식했다.[4] 일본의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도 보석조차 진가를 인정받기까지 이토록 고생하는데 하물며 사람의 진가는 어떻겠느냐는 것이 《한비자》의 요지라고 설명한다.[3]

  • 네 글자 ‘和氏之璧’은 같은 전국 시대 문헌인 《묵자(墨子)》 〈경주(耕柱)〉에도 “화씨의 구슬과 수후의 구슬(和氏之璧,隋侯之珠)”이 제후들이 말하는 좋은 보배의 예로 나온다. 묵자는 이것들이 백성을 이롭게 하지 못하니 천하의 참된 보배가 아니며, 의(義)야말로 천하의 좋은 보배라고 했다.[5]
  • 전한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세 번째 임금이 문왕이 아니라 공왕(共王)으로 되어 있고, 공왕이 “안타깝다. 선왕들은 돌을 쪼개 보기는 어렵게 여기면서 사람의 발을 베기는 쉽게 여겼구나(惜矣,吾先王之聽難,剖石而易,斬人之足)” 하고 탄식하는 대목이 더 있다. 우는 곳도 ‘형산(荊山)’으로 적었다.[6]
  • 《사기》 〈범저채택열전〉에서 범저(范雎)는 진 소왕에게 보낸 글에서 “주에는 지액(砥砨), 송에는 결록(結綠), 양에는 현려(縣藜), 초에는 화박(和朴)이 있다”고 하여 이 옥을 천하의 네 보배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7]

인상여와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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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염파인상여열전〉은 “조나라 혜문왕 때 초나라의 화씨벽을 얻었다(趙惠文王時,得楚和氏璧)”로 시작해, 진나라 소왕이 성 열다섯 개와 바꾸자고 하자 인상여가 구슬을 들고 가서 온전히 조나라로 되가져온 이야기를 전한다.[8] 자세한 내용은 완벽귀조와 완벽 문서에 있다.

잘못 알려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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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등에는 무왕이 형인 여왕을 시해하고 즉위했다는 설명이 있으나, 《사기》 〈초세가〉에는 초나라에 ‘여왕’이라는 임금이 보이지 않고, 무왕 웅통(熊通)은 형 분모(蚡冒)가 죽은 뒤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즉위했다(弒蚡冒子而代立)”고 되어 있다.[9] 또 《사기》에 따르면 웅통이 스스로 ‘무왕’이라 칭한 것은 재위 37년의 일이므로,[9] 《한비자》 이야기의 왕 이름을 그대로 역사적 연대에 맞추기는 어렵다.

전국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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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이 구슬로 ‘전국새(傳國璽)’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태평어람》 권682는 최호(崔浩)의 《한기음의(漢紀音義)》를 인용해 “전국새는 화씨벽으로 만들었다(傳國璽,是和氏璧作之)”고 적는 한편, 《옥새보(玉璽譜)》를 인용해 “전국새는 진시황이 새긴 것으로, 그 옥은 남전산(藍田山)에서 났다”는 다른 설도 함께 싣는다.[10] 박지원(朴趾源)도 〈옥새론(玉璽論)〉에서 인상여가 지켜 낸 구슬이 진나라로 들어가 전국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고 보물로 나라를 전하는 풍조를 비판했다.[11]

한국 문헌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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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정복(安鼎福)은 1756년에 쓴 〈위생록발(衛生錄跋)〉을 “화씨의 구슬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만 내 손가락 하나와 바꿀 수 없는 것은, 제 손가락을 구슬보다 아끼기 때문이다(和氏之璧,天下之至寶也,而不能易吾之一指者,愛己之指踰於璧也)”라는 말로 시작해, 몸을 아끼는 양생의 도리를 말했다.[12]
  • 김육(金堉)은 인상여가 되어 구슬을 받들고 진나라에 들어가기를 청하는 글을 가상으로 지으며 “이 화씨의 구슬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보배(顧此和氏之璧,實爲希世之珍)”라고 했다.[13]
  • 오래된 레거시 코드 속에서 아무도 몰라보던 화씨지벽 같은 알고리즘을 찾아냈다.
  • 그의 보고서는 처음엔 무시당했지만, 사고가 난 뒤에야 화씨지벽이었음이 드러났다.
  • 그 도자기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씨지벽으로 불린다.
  • 《한비자》 〈해로(解老)〉에는 “화씨의 구슬은 오색으로 꾸미지 않고, 수후의 구슬은 은과 황금으로 꾸미지 않는다. 바탕이 지극히 아름다워 무엇으로도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和氏之璧,不飾以五采;隋侯之珠,不飾以銀黄。其質至美,物不足以飾之)”라는 말도 있다.[14] 화씨의 구슬과 수후의 구슬을 함께 일컫는 ‘화벽수주(和璧隋珠)’는 매우 귀한 보배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15]
  •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복옹자전(福翁自伝)》(1899)에서 귀한 원서를 손에 넣은 기쁨을 “연성의 구슬을 손에 쥔 것 같다”고 표현했다.[3]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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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씨벽(和氏璧), 화벽(和璧), 연성벽(連城璧): 화씨지벽과 같은 말.
  • 화벽수주(和璧隋珠): 화씨의 구슬과 수후의 구슬. 매우 귀한 보배.
  • 완벽(完璧), 완벽귀조(完璧歸趙): 인상여가 이 구슬을 온전히 지켜 돌아온 데서 나온 말.
  • 가치연성(價值連城): 여러 성과 맞먹는 값. 매우 귀한 보배.
  1.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화씨지벽”,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D%99%94%EC%94%A8%EC%A7%80%EB%B2%BD, 확인날짜=2026-10-10.
  2.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和氏璧”,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8027, 확인날짜=2026-10-10.
  3. ↑ 3.0 3.1 3.2 3.3 3.4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和氏の璧”,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5%92%8C%E6%B0%8F%E3%81%AE%E7%92%A7, 확인날짜=2026-10-10.
  4. ↑ 4.0 4.1 4.2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
  5. ↑ 《묵자(墨子)》 〈경주(耕柱)〉.
  6. ↑ 유향(劉向), 《신서(新序)》 권5 〈잡사(雜事) 5〉.
  7.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79 〈범저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
  8.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8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9. ↑ 9.0 9.1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40 〈초세가(楚世家)〉.
  10. ↑ 이방(李昉) 등, 《태평어람(太平御覽)》 권682 .
  11. ↑ 박지원(朴趾源), 《연암집(燕巖集)》 권1, 〈옥새론(玉璽論)〉,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68A_0010_040_001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68A_0010_040_0010, 확인날짜=2026-10-10.
  12. ↑ 안정복(安鼎福), 《순암집(順菴集)》 권18, 〈위생록발(衛生錄跋) 병자(丙子)〉,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34A_0180_030_001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34A_0180_030_0010, 확인날짜=2026-10-10.
  13. ↑ 김육(金堉), 《잠곡유고(潛谷遺稿)》 권10, 〈의조인상여청봉벽입진전(擬趙藺相如請奉璧入秦箋)〉,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322A_0110_060_001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322A_0110_060_0010, 확인날짜=2026-10-10.
  14. ↑ 《한비자(韓非子)》 〈해로(解老)〉.
  15.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和璧隋珠”,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5628, 확인날짜=202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