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토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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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토중래(捲土重來)는 땅을 말아 일으킬 듯한 기세로 다시 온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한 사람이 힘을 되찾아 다시 쳐들어오거나 다시 도전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권토(捲土)’는 사람과 말이 내달리며 흙먼지를 말아 올리는 모습이다.[2] 싸움에 진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몰려오는 장면에서 나온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선거에서 낙선한 사람의 재출마, 시장에서 밀려난 기업의 재진입, 부진했던 선수의 복귀처럼 실패 뒤의 재도전을 두루 가리킨다. “권토중래를 노리다”, “권토중래를 다짐하다”처럼 쓴다.
중국어에서도 같은 한자로 쓰며, 원래 글자대로 ‘卷土重來’라고도 적는다.[2] 일본어에서는 ‘けんどちょうらい’ 또는 ‘けんどじゅうらい’로 읽는데, 두 읽기 모두 전쟁 전부터 쓰여 어느 쪽도 틀리지 않다고 한다.[3]
시의 배경은 《사기》 〈항우본기〉에 기록된 항우(項羽)의 최후이다. 해하(垓下)에서 포위를 뚫고 달아난 항우는 동성(東城)에 이르렀을 때 기병이 28명만 남았고, 마침내 오강에 이르렀다.[5]
於是項王乃欲東渡烏江。烏江亭長檥船待,謂項王曰:「江東雖小,地方千里,眾數十萬人,亦足王也。願大王急渡。今獨臣有船,漢軍至,無以渡。」項王笑曰:「天之亡我,我何渡為!且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今無一人還,縱江東父兄憐而王我,我何面目見之?縱彼不言,籍獨不愧於心乎?」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 놓고 기다리다가 “강동이 작다고는 하나 땅이 사방 천 리이고 무리가 수십만이니 왕 노릇 하기에 넉넉합니다. 어서 건너십시오”라고 권했다. 항우는 웃으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데 건너서 무엇 하겠는가. 강동의 젊은이 8천 명과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가엾게 여겨 왕으로 삼아 준들 무슨 낯으로 그들을 보겠는가”라고 하며, 타던 오추마를 정장에게 주고 걸어서 싸우다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5] 두목은 치욕을 참고 강을 건넜다면 결과를 알 수 없었으리라며, 항우의 선택을 아쉬워한 것이다.
나무위키 등에는 오강의 “사내들”이 배를 끌고 와 재기를 권했다고 소개된 경우가 있으나, 《사기》 원문에는 배를 대고 기다린 사람이 오강의 정장 한 사람(烏江亭長檥船待)으로 되어 있다.[5]
두목의 이 시는 역사 해석을 두고 뒷사람들의 논쟁을 불렀다.
- 왕안석의 반론: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은 〈오강정(烏江亭)〉에서 “백 번 싸워 지친 장사들은 슬퍼하고, 중원에서 한 번 지니 형세를 되돌리기 어렵다. 강동의 젊은이들이 지금 있다 한들, 군왕을 위해 흙먼지 일으키며 돌아오려 하겠는가(百戰疲勞壯士哀,中原一敗勢難回。江東子弟今雖在,肯與君王卷土來)”라고 읊어 두목과 반대로 보았다.[6]
- 호자의 비평: 남송의 호자(胡仔)는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서 두목이 제영시(題詠詩)에서 남다른 말을 좋아했다고 하면서 〈제오강정〉은 “남다름을 좋아하다가 이치에 어긋났다(好異而叛於理)”고 평했다. 항우는 8천 명을 데리고 강을 건넜다가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못해 인심을 크게 잃었으니 누가 다시 그를 따르겠느냐, 권토중래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7]
- 고려 이색의 시: 이색(李穡)은 〈강동가(江東歌)〉에서 항우가 범증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다면서 “흙먼지 말아 다시 온들 참으로 낯 두꺼운 일(捲土重來多厚顏)”이라고 읊어, 강을 건너지 않은 항우의 선택 쪽에 섰다.[8]
- 조선 김매순의 비판: 김매순(金邁淳)은 《대산집(臺山集)》에서 항우가 강동으로 가지 않은 참된 까닭은 8천 자제의 생사보다 의제(義帝)를 죽여 강동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두목의 구절을 들어 “문인의 말이 이렇게 우활한가(文人之言,若是迂耶)”라고 했다.[9]
《성어전》은 명나라 이후의 용례로 구식사(瞿式耜)의 상소, 《명사(明史)》 〈오정육전(吳貞毓傳)〉, 청나라 황종희(黃宗羲)의 묘지명 등을 든다. 《명사》 〈외국열전·조선〉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돌아가 관백에게 보고하고 권토중래하려 해도(欲歸報關白捲土重來)” 바람이 불리하고 겨울 추위에 시달린다는 대목도 있다.[2]
조선에서도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무렵의 기록에 보인다.
- 선조 29년(1596) 12월,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깨진 뒤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은 일본군이 “권토중래하는 데까지 이를지도 알 수 없다(至於卷土重來,亦未可知)”며 재침을 우려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10]
-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직후 명나라 등래순무(登萊巡撫)는 조선에 보낸 글에서 “조금 꺾였다고 스스로 기죽지 말고…… 남은 힘을 거두어 권토중래하여 흉한 기운을 쓸어내자(毋以小挫自沮……其惟收拾餘燼,捲土重來,期靖兇氛)”고 했다.[11]
일본에서는 《일본국어대사전》이 1901년 도바리 지쿠후(登張竹風)의 평론을 첫 용례로 든다.[3]
| 한자 | 음 | 기본 의미 | 성어 안의 의미 |
|---|---|---|---|
| 捲 | 권 | 말다, 걷다 | (흙먼지를) 말아 올리다 |
| 土 | 토 | 흙 | 흙먼지 |
| 重 | 중 | 무겁다, 거듭 | 다시 |
| 來 | 래 | 오다 | 쳐들어오다 |
- 지난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4년 동안 지역을 누비며 권토중래를 준비했다.
- 한때 시장에서 밀려났던 그 회사는 새 운영체제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 예선 탈락의 아쉬움을 딛고 권토중래한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권토중래”,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6%8C%ED%86%A0%EC%A4%91%EB%9E%98, 확인날짜=2026-09-26.
- ↑ 2.0 2.1 2.2 2.3 2.4 2.5 2.6 2.7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捲土重來”,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636, 확인날짜=2026-09-26.
- ↑ 3.0 3.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捲土重来”,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8D%B2%E5%9C%9F%E9%87%8D%E6%9D%A5, 확인날짜=2026-09-26.
- ↑ 두목, 〈제오강정(題烏江亭)〉, 《전당시(全唐詩)》 권523. 《전당시》는 첫 구의 ‘兵家事不’를 ‘由來不可’로, 셋째 구의 ‘才’를 ‘豪’로 적은 판본도 있다고 주를 달았다.
- ↑ 5.0 5.1 5.2 사마천,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
- ↑ 왕안석, 〈오강정(烏江亭)〉(〈첩제오강정(疊題烏江亭)〉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도목(都穆)의 《남호시화(南濠詩話)》에는 두목의 시와 나란히 인용되어 있으며, 마지막 구가 ‘肯為君王捲土來’로 되어 있다.
- ↑ 호자,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 후집 권15.
-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이색,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9 〈강동가(江東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20A_0260_010_0520, 확인날짜=2026-09-26.
-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김매순, 《대산집(臺山集)》 권18 〈주말(周末) 제4〉,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608A_0190_010_0010, 확인날짜=2026-09-26.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3권, 선조 29년 12월 25일 정해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912025_001, 확인날짜=2026-09-26.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5월 6일 신미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pa_10505006_001, 확인날짜=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