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검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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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절약(勤儉節約)은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재물을 아낀다는 뜻의 한자성어이다.[1]
열심히 일해서 벌고(勤), 씀씀이를 검소하게 하며(儉), 아낄 수 있는 것은 아낀다(節約)는 생활 태도를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살림살이에서 나라의 재정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며, “근검절약하다”, “근검절약의 정신”, “근검절약이 몸에 배다”처럼 쓴다. 근면(勤勉)과 검약(儉約)을 함께 이르는 말로,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가정 교육과 국민 계몽의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특정 고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함께 기리는 생각은 오래되었다.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은 우를 두고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집안 살림에 검소하였다(克勤于邦,克儉于家)”고 칭찬했고, 여기서 극근극검(克勤克儉)이라는 성어가 나왔다.[2]
옛 한문에서 오늘날의 근검절약에 해당하는 네 글자는 ‘근검절용(勤儉節用)’이었다. 당나라 성현영(成玄英)은 《장자》 〈천하〉 편의 묵가(墨家)에 대한 대목을 풀이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3]
勤儉節用,儲積財物,以備世之凶灾急難也。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씀씀이를 아껴 재물을 모아 둠으로써 세상의 흉년과 재난에 대비한다.”
조선에서도 근검절용이 널리 쓰였다. 성종은 1472년 사치 풍조를 경계하는 전지에서 “우리 동방은 산이 높고 물살이 빠르며 땅이 메말라, 근검절용해도 재물이 넉넉하지 못할까 걱정이다(念我東方,山峻、水駛,土地磽薄,勤儉節用,猶患財用之不裕)”라고 하고, 위로 공경대부부터 아래로 백성까지 “근검절용하여 생업을 이루라”고 명했다.[4] 그보다 앞선 1451년(문종 1) 기사에도 “옛날 큰일을 한 임금은 반드시 근검절용을 앞세웠다(古之有爲之主,必先勤儉節用)”는 말이 보인다.[5]
‘勤儉節約’이라는 네 글자는 중국 고전 원문과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는다.[6] 실록 국역본에는 ‘근검절약’이 수십 건 나오지만 모두 원문의 다른 표현을 옮긴 번역어이다.[6]
문집에서 확인되는 이른 용례는 권이진(權以鎭, 1668~1734)이 지은 광평군(光平君) 이명(李溟)의 묘지명으로, 부인의 덕을 기리며 “근검절약하여 화려한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다(勤儉節約。不喜華餙)”고 하였다.[7] 19세기 신기선(申箕善)은 집안 규약 〈가약(家約)〉에서 “음식과 의복은 집안의 절실한 쓰임이니, 근검절약은 집안을 다스리는 급한 일이다(飮食衣服。有家之切用。勤儉節約。治家之急務)”라고 적었다.[8] ‘절용’ 대신 ‘절약’을 쓴 네 글자는 조선 후기 문집에서 쓰이기 시작해 근대에 굳은 것으로 보인다.
- 클라우드 비용이 급증하자 회사는 쓰지 않는 서버를 정리하는 근검절약 캠페인을 벌였다.
- 할머니는 평생 근검절약해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 근검절약도 좋지만 꼭 필요한 보안 투자까지 줄여서는 안 된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근검절약”,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7%BC%EA%B2%80%EC%A0%88%EC%95%BD, 확인날짜=2026-10-11.
- ↑ 2.0 2.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克勤克儉”,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493, 확인날짜=2026-10-11.
- ↑ 곽상(郭象) 주, 성현영(成玄英) 소, 《남화진경주소(南華眞經注疏)》 〈천하(天下)〉.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1권, 성종 3년 8월 23일 정해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ia_10308023_004, 확인날짜=2026-10-1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7권, 문종 1년 5월 22일 기미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ea_10105022_003, 확인날짜=2026-10-11.
- ↑ 6.0 6.1 6.2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원문 검색 및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원문 검색, “勤儉節約”, https://sillok.history.go.kr/ · https://sjw.history.go.kr/ ·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10-11.
- ↑ 권이진(權以鎭), 〈광평군묘지명(光平君墓誌銘)〉, 《유회당집(有懷堂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965A_0090_030_0010, 확인날짜=2026-10-11.
- ↑ 신기선(申箕善), 〈가약(家約)〉, 《양원유집(陽園遺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659A_0140_030_0080, 확인날짜=2026-10-11.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잡지자료, 상호(尙灝), 〈고아이천만동포(告我二千萬同胞)〉, 《태극학보》 제2호, ma_007_0020_0070, https://db.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11.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잡지자료, 박달성(朴達成), 〈유야무야? 조선인의 「생도」(有耶無耶? 朝鮮人의 「生道」)〉, 《개벽》 제29호, ma_013_0280_0070, https://db.history.go.kr/, 확인날짜=2026-10-11.
- ↑ 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봉공(奉公)〉 선화(宣化), 이정섭 역(1986).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88A_0040_020_0020, 확인날짜=2026-10-11.
- ↑ 정약용(丁若鏞), 〈계부가옹행장(季父稼翁行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597A_0170_070_0010, 확인날짜=2026-10-11.
- ↑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 “勤倹”,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5%8B%A4%E5%80%B9, 확인날짜=202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