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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금여석(見金如石)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으로, 재물을 탐내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고려 말의 장군 최영(崔瑩)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가르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

흔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풀어 쓴다. 재물이나 뇌물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청렴한 태도, 공직자의 몸가짐을 말할 때 쓰며, 최영의 좌우명이나 청백리의 가훈으로 소개되는 일이 많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에는 표제어로 올라 있지 않다.[2] 중국 고전에서 온 말이 아니라 고려·조선의 역사서와 필기에 전하는 한국의 성어이다.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見 견 보다 보다, 여기다
金 금 쇠, 금 황금, 재물
如 여 같다 ~와 같이
石 석 돌 하찮은 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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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이 좌절된 뒤 처형되었다. 《고려사》 열전은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1]

初瑩年十六,父臨終戒之曰:「汝當見金如石。」瑩佩服,不事産業,居第甚隘陋,處之怡然。

“처음에 최영이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경계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가슴에 새겨 재산을 모으지 않았고, 사는 집이 매우 좁고 누추했으나 편안히 여겼다.”

이어서 그가 먹고 입는 것이 검소해 자주 끼니가 떨어졌고,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은 사람을 개돼지처럼 보았으며, 오래 장수와 재상을 지내고 병권을 쥐었으나 청탁이 통하지 않아 세상이 그 청렴에 감복했다고 적었다.[1] 《고려사절요》는 같은 내용을 우왕 14년 조에 실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원직(元直)이라 밝히고, 유훈을 “見金如石” 네 글자로 적었다.[3]

《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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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권3에는 이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최영이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늘 이 말을 들었고, 이 네 글자를 큰 띠(紳)에 써서 평생 몸에 지니며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정을 잡아 위엄이 안팎에 떨쳤어도 남의 것은 털끝만큼도 취하지 않아 집안은 겨우 먹고살 만했다고 한다.[4]

崔鐵城瑩少時。其父常戒之曰。見金如土[石]。瑩。常以四字書諸紳。終身服膺而勿失。

《대동야승》에 실린 《용재총화》 원문은 이 대목을 ‘見金如土’(황금 보기를 흙같이)로 적었고, 한국고전종합DB의 교감은 이를 ‘石’으로 바로잡아 두었다.[4] 그래서 국역본에는 “황금을 보기를 흙같이 하라”로 옮겨져 있다. ‘흙같이’라는 풀이가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나, 《고려사》·《고려사절요》는 모두 ‘石’이다.

최영의 아버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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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는 최영의 아버지를 원직(元直)이라 하였으나,[3]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아버지 옹(雍)이 경계하여(父雍戒之曰)”라고 적었다.[5] 사자성어 목록류에서 이 말을 ‘최옹(崔壅)의 유훈’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름 글자는 ‘雍’이며 가장 이른 기록인 《고려사절요》에는 원직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청백리 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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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이 말이 청백리 집안의 가훈으로도 쓰였다.

  • 이륙(李陸)이 지은 이석형(李石亨)의 행장에는 그가 재산을 모으지 않고 “자제를 가르칠 때 반드시 견금여석으로 했다(訓子弟。必以見金如石)”고 적혀 있다.[6]
  •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성종 때의 청백리 이약동(李約東)을 두고 “자손을 가르칠 때 반드시 견금여석으로 했다(訓子孫必以見金如石)”고 적었다. 같은 조목에는 그가 제주 목사 시절 쓰던 채찍 하나를 떠날 때 벽에 걸어 두었는데, 섬사람들이 이를 보배처럼 간직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7]

최영의 일화는 중국에도 전해져, 청나라 《고금도서집성》 〈변예전〉과 《사고전서》에 수록된 《조선사략(朝鮮史略)》에도 “父元直臨終戒之曰:見金如石”이 실려 있다.[8]

  • 납품 업체가 건넨 상품권을 돌려보낸 구매 담당자의 일화는 견금여석의 좋은 예로 사내 윤리 교육에 소개되었다.
  • 그는 공직에 들어서며 견금여석 네 글자를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
  • 견금여석을 말로 외치기는 쉽지만, 눈앞의 이익 앞에서 지키기는 어렵다.
  • 《용재총화》에는 최영이 처형될 때 “내가 평생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고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성현의 시대까지 풀 한 포기 없어 사람들이 ‘붉은 무덤(紅墳)’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4]
  • 같은 조목에는 다른 재상들이 바둑을 두며 앞다투어 진수성찬을 차릴 때 최영만은 해가 저물도록 음식을 내지 않다가 기장과 쌀을 섞은 밥과 나물을 내놓았는데, 굶주린 손님들이 “철성(최영)의 밥이 참 달다”고 하자 “이것도 용병의 꾀”라고 웃었다는 일화도 있다.[4]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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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견리사의(見利思義): 눈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함.
  • 청렴결백(淸廉潔白): 마음이 맑고 탐욕이 없음.
  •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겨 지킴.
  • 견물생심(見物生心):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생김. 견금여석과 반대되는 마음가짐.
  • 휘금여토(揮金如土): 돈을 흙처럼 마구 씀. 대만 교육부 《성어전》이 극근극검(克勤克儉)의 반의어로 든 말이다.[9]
  1. ↑ 1.0 1.1 1.2 정인지(鄭麟趾) 등, 《고려사(高麗史)》 권113 〈열전〉 최영.
  2.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우리말샘 검색, “견금여석”,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A%B2%AC%EA%B8%88%EC%97%AC%EC%84%9D · https://open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query=%EA%B2%AC%EA%B8%88%EC%97%AC%EC%84%9D, 확인날짜=2026-10-11.
  3. ↑ 3.0 3.1 김종서(金宗瑞) 등,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3, 신우(辛禑) 14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GO#/dir/node?dataId=ITKC_GO_1294A_0340_010_0010, 확인날짜=2026-10-11.
  4. ↑ 4.0 4.1 4.2 4.3 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6A_0030_000_0010, 확인날짜=2026-10-11.
  5. ↑ 안정복(安鼎福),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7, 창왕 즉위년(1388).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GO#/dir/node?dataId=ITKC_GO_1366A_0380_000_0010, 확인날짜=2026-10-11.
  6. ↑ 이륙(李陸), 〈행장(行狀)〉, 이석형(李石亨), 《저헌집(樗軒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57A_0050_010_0010, 확인날짜=2026-10-11.
  7. ↑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성종조의 명신’ 이약동 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GO#/dir/node?dataId=ITKC_GO_1300A_0070_020_0110, 확인날짜=2026-10-11.
  8. ↑ 《조선사략(朝鮮史略)》 권11(《사고전서》 수록본);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방여휘편 변예전〉 제23권.
  9.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克勤克儉”,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493, 확인날짜=202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