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모수자천(毛遂自薦)은 모수가 자기를 스스로 추천했다는 뜻으로, 자기가 자기를 추천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의 식객 모수(毛遂)가 초(楚)나라에 갈 사신단에 자기를 넣어 달라고 나선 고사에서 나왔다.

남이 알아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일을 맡겠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 있게 나서는 적극성을 좋게 이를 때도 쓰고, 제 입으로 저를 내세우는 모습을 비꼴 때도 쓴다. 오늘날에는 선거 출마, 공모 지원, 스스로 입후보하는 일 등에 자주 빗댄다.

‘모수’는 사람 이름이다. 중국어에서도 ‘毛遂自薦(毛遂自荐)’이라고 하여 흔히 쓰며,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은 이 말을 “자진해서 나서 스스로를 추천함”의 비유로 풀이하고, ‘遂’를 ‘逐’으로 잘못 쓰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2]

같은 이야기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 탈영이출(脫穎而出), 삼촌지설(三寸之舌), 인인성사(因人成事) 같은 말도 함께 나왔다.

《사기》 〈평원군우경열전〉

편집 원본 편집

사마천의 《사기》 권7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에 나온다.[3]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고 합종(合從)을 맺게 했다. 평원군은 식객 가운데 용기와 문무를 두루 갖춘 사람 스무 명을 데려가려 했지만 열아홉 명을 뽑은 뒤로는 더 뽑을 사람이 없었다. 북송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 일을 장평 전투 뒤 진나라가 한단을 에워싼 주 난왕(赧王) 57년(기원전 258년) 조에 적는다.[4] 그때 모수가 나섰다.

門下有毛遂者,前,自贊於平原君曰:「遂聞君將合從於楚,約與食客門下二十人偕,不外索。今少一人,願君即以遂備員而行矣。」

[3]

“문하에 모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앞으로 나와 평원군에게 스스로를 천거하며 말했다. ‘듣자니 군께서 초나라와 합종을 맺으러 가시면서 식객 스무 명과 함께 가기로 하시고 밖에서는 구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제 한 사람이 모자라니, 저를 그 수에 채워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진 선비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 그 끝이 곧 드러나는 법인데, 선생은 내 문하에 세 해나 있었어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며 거절했다. 모수는 “오늘에야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니, 일찍 넣어 주셨다면 송곳 자루까지 쑥 빠져나왔을 것”이라고 받아쳤고, 평원군은 결국 그를 데려갔다. 이 문답에서 낭중지추와 ‘탈영이출’이 나왔다. 다른 열아홉 사람은 서로 눈짓하며 그를 비웃었다.[3]

초나라에 이르는 동안 모수와 토론한 열아홉 사람은 모두 그에게 탄복했다. 초나라 왕과의 회담은 해 뜰 무렵 시작해 한낮이 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모수는 칼자루를 잡고 계단을 올라가, 꾸짖는 초나라 왕에게 “열 걸음 안에서는 왕께서 초나라의 많은 군사를 믿으실 수 없으니 왕의 목숨이 제 손에 달려 있다”고 맞섰다. 이어 탕왕과 문왕이 작은 땅으로 천하를 얻은 예를 들고,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초나라의 도읍 언영(鄢郢)을 빼앗고 이릉(夷陵)을 불태워 초나라 선왕을 욕보인 일을 상기시키며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초나라 왕은 그 자리에서 합종을 받아들였고, 모수는 닭·개·말의 피를 담은 구리 쟁반을 받들어 왕과 평원군이 차례로 삽혈(歃血)하게 했다. 그러고는 왼손에 쟁반을 들고 오른손으로 당 아래의 열아홉 사람을 불러 말했다.

公相與歃此血於堂下。公等錄錄,所謂因人成事者也。

[3]

“공들은 당 아래에서 함께 이 피를 마시시오. 공들은 변변치 못하니, 이른바 남의 힘에 기대어 일을 이루는 자들이오.” 여기서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이 나왔다.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모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가 백만 군사보다 강했다(毛先生以三寸之舌,彊於百萬之師)”며 다시는 감히 선비를 평가하지 않겠다고 하고,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3]

네 글자 형태

편집 원본 편집

《사기》 원문은 ‘스스로를 천거하다’를 ‘自贊’으로 썼다. ‘自薦’으로 바꾼 네 글자 형태에 대해 《성어전》은 북송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권5의 “모수가 평원군에게 자천했다(毛遂自薦於平原君)”를 첫 용례로 든다.[2] 청나라 소설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에는 “만생이 주제넘게도 모수자천을 본받아(竟學那毛遂自薦)” 스스로 가정교사를 자청하는 장면이 나온다.[2]

한국 문헌의 용례

편집 원본 편집
  • 《성종실록》 성종 18년(1487) 기사에 따르면, 유양춘이 임금에게 부(賦)를 지어 바치며 벼슬을 구하자 이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서거정이 옛날에도 글을 바쳐 등용을 구한 사람이 많았다며 두둔하자, 윤필상은 “옛사람 가운데 모수의 자천이나 한유의 상서 같은 일이 있었으나 유양춘의 일은 그렇지 않다(古人如毛遂自薦,韓愈上書;陽春之事,則不然)”고 했고, 성종은 유양춘을 파직했다.[5]
  •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 옥천에 있던 조헌(趙憲)은 일본의 국서에 분개해 올린 상소에서 “종군(終軍)은 약관에 적을 묶어 올 끈을 청했고, 모수는 자천하여 송곳 자루까지 빠져나왔으니, 이들이 어찌 염치를 잊은 자들이겠는가(終軍弱冠而請纓;毛遂自薦而脫穎,彼豈專忘廉恥者乎)”라며 자신이 나서는 까닭을 밝혔다.[6] 조헌의 문집 《중봉집(重峯集)》에 실린 같은 상소에는 ‘毛遂自薦爲頴脫’로 되어 있다.[7]
  • 정조는 인재 천거를 주제로 낸 책문에서 “이윤은 탕왕에게 스스로 구했고, 곽외는 연나라 왕에게 스스로 스승이 되었으며, 모수는 평원군에게 자천했고, 동방삭은 한 무제에게 스스로를 자랑했다(毛遂自薦於平原)”고 들고, 제 입으로 저를 천거한 이들이 ‘약금(躍金)’, 곧 풀무 속 쇠가 스스로 명검이 되겠다고 뛰어오른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8]
  • 모수를 낮게 본 평가도 있다. 조수삼(趙秀三)은 〈서평원군전후(書平原君傳後)〉에서 모수가 초나라 왕을 “다섯 걸음 안(五步之內)”이라며 위협한 것은 형가(荊軻)·섭정(聶政) 같은 자객의 겁박에 지나지 않고, 초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백기의 치욕과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었다고 보았다. 피 쟁반을 들고 열아홉 사람을 꾸짖은 대목도 지나친 자랑이라고 했다.[9] 《사기》 원문은 ‘열 걸음 안(十步之內)’이다.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毛 모 털 성씨 (모수의 성)
遂 수 이루다, 드디어 이름 (모수의 이름)
自 자 스스로 스스로
薦 천 천거하다 추천하다
  • 사고 대응 태스크포스에 지원자가 없자 입사 2년 차 엔지니어가 모수자천하여 팀장을 맡았다.
  • 그는 오픈 소스 메인테이너 자리에 모수자천했고, 1년 만에 가장 활발한 기여자가 되었다.
  • 이번 공모에서는 추천을 기다리지 않고 모수자천한 후보가 많았다.

유의어와 관련 표현

편집 원본 편집
  • 자고분용(自告奮勇): 스스로 나서서 용감하게 일을 맡음. 《성어전》이 가까운 말로 든다.[2]
  •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 재능 있는 사람은 저절로 드러남.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 말.
  • 탈영이출(脫穎而出):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재능이 드러남.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 말.
  • 삼촌지설(三寸之舌): 세 치의 혀. 뛰어난 말솜씨.
  • 인인성사(因人成事): 남의 힘에 기대어 일을 이룸.
  • 반대 의미: 과족불전(裹足不前): 발을 싸매고 나아가지 않음. 머뭇거리며 나서지 않음.[2]
  1.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모수자천”,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AA%A8%EC%88%98%EC%9E%90%EC%B2%9C, 확인날짜=2026-09-27.
  2. ↑ 2.0 2.1 2.2 2.3 2.4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毛遂自薦”,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291, 확인날짜=2026-09-27.
  3. ↑ 3.0 3.1 3.2 3.3 3.4 사마천, 《사기》 권7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4. ↑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 권5 〈주기(周紀) 5〉 난왕 57년.
  5.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09권, 성종 18년 11월 7일 임인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ia_11811007_002, 확인날짜=2026-09-27.
  6.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7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b_12403001_007, 확인날짜=2026-09-27.
  7. ↑ 조헌(趙憲), 《중봉집(重峯集)》 권8, 〈청참왜사이소(請斬倭使二疏)〉,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230A_0090_010_002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230A_0090_010_0020, 확인날짜=2026-09-27.
  8. ↑ 정조,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1 〈책문(策問) 4〉, 〈천거(薦擧)〉,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84A_0510_010_013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84A_0510_010_0130, 확인날짜=2026-09-27.
  9. ↑ 조수삼(趙秀三), 《추재집(秋齋集)》 권8, 〈서평원군전후(書平原君傳後)〉,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자료ID ITKC_MO_0592A_0100_120_0020, https://db.itkc.or.kr/dir/node?dataId=ITKC_MO_0592A_0100_120_0020, 확인날짜=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