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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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지진(背水之陣)은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陣)을 뜻하는 한자성어로, 흔히 줄여서 ‘배수진(背水陣)’이라고 한다. 중국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쳐서 병사들이 물러서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우게 하여 조(趙)나라 군사를 물리친 데서 유래한다.[1] 오늘날에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처지에서 모든 것을 걸고 맞서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더 많이 쓴다.[2]
일상에서는 네 글자 ‘배수지진’보다 ‘배수진’이 훨씬 많이 쓰이며, “배수진을 치다”라는 형태로 굳어 있다. 시험, 사업, 협상, 선거처럼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들 때 쓴다. 스포츠에서는 다음 경기를 생각하지 않고 가용 전력을 모두 쏟아붓는 운영을 가리켜 “배수진을 쳤다”고 하기도 한다.
중국어에서는 같은 뜻으로 ‘배수일전(背水一戰)’을 주로 쓰고, 대만 교육부 《성어전》도 이 형태를 표제어로 올린다.[3] 일본어에서는 ‘背水の陣(はいすいのじん)’이라고 하며, 《일본국어대사전》은 첫 용례로 14세기 후반의 군담 《태평기(太平記)》 권32를 든다.[4]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오는 정형(井陘) 전투에서 나온 말이다.[5] 초한 전쟁 중이던 기원전 204년,[4] 한신과 장이(張耳)는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정형 어귀를 지나 조나라를 치려 했다. 조나라는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가 이끄는 군사를 정형 어귀에 모았는데, 그 수가 20만이라고 일컬어졌다.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는 좁은 길목에서 한나라 군의 보급로를 끊자고 했지만 진여는 따르지 않았다.
한신은 한밤중에 날랜 기병 2천 명을 골라 한 사람마다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하나씩 들려 샛길로 산에 숨게 하고, “조나라 군이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채를 비우고 쫓아올 것이니, 그때 재빨리 들어가 조나라 깃발을 뽑고 한나라 깃발을 세우라”고 일렀다. 그리고 “오늘 조나라를 깨뜨리고 모여서 밥을 먹자”고 했으나 장수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信乃使萬人先行,出,背水陳。趙軍望見而大笑。平旦,信建大將之旗鼓,鼓行出井陘口,趙開壁擊之,大戰良久。於是信、張耳詳弃鼓旗,走水上軍。水上軍開入之,復疾戰。趙果空壁爭漢鼓旗,逐韓信、張耳。韓信、張耳已入水上軍,軍皆殊死戰,不可敗。
한신은 먼저 1만 명을 내보내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고, 조나라 군은 이를 보고 병법도 모른다며 크게 비웃었다. 날이 밝자 한신은 대장의 깃발과 북을 앞세우고 정형 어귀로 나가 싸우다가 거짓으로 깃발과 북을 버리고 강가의 진으로 물러났다. 조나라 군이 성채를 비우고 쫓아오자, 물러설 곳이 없는 한나라 군은 모두 죽기로 싸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사이 숨어 있던 기병 2천이 빈 조나라 성채에 들어가 한나라의 붉은 깃발 2천 개를 세웠다. 이를 본 조나라 군은 한나라가 이미 조왕과 장수들을 사로잡은 줄 알고 흩어졌고, 한나라 군은 앞뒤에서 공격해 진여를 저수(泜水) 가에서 베고 조왕 헐(歇)을 사로잡았다.[5]
싸움이 끝난 뒤 장수들이 까닭을 묻자 한신은 이렇게 답했다.
諸將效首虜,畢賀,因問信曰:「兵法右倍山陵,前左水澤,今者將軍令臣等反背水陳,曰破趙會食,臣等不服。然竟以勝,此何術也?」信曰:「此在兵法,顧諸君不察耳。兵法不曰『陷之死地而後生,置之亡地而後存』?且信非得素拊循士大夫也,此所謂『驅市人而戰之』,其勢非置之死地,使人人自爲戰;今予之生地,皆走,寧尚可得而用之乎!」
장수들은 “병법에는 산과 언덕을 오른쪽이나 뒤에 두고, 물과 늪을 앞이나 왼쪽에 두라고 했는데, 장군은 도리어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겼으니 무슨 술법입니까?”라고 물었다. 한신은 “이것도 병법에 있는데 그대들이 살피지 못했을 뿐이다. 병법에 ‘죽을 땅에 빠뜨린 뒤에야 살고, 망할 땅에 둔 뒤에야 보존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나는 평소에 길들인 군사를 거느린 것이 아니라 이른바 ‘저잣거리 사람들을 몰아다 싸우게 한’ 셈이었다. 형세상 죽을 땅에 두어 저마다 스스로 싸우게 하지 않고 살 길이 있는 곳에 두었다면 모두 달아났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신이 인용한 병법은 《손자병법》 〈구지(九地)〉의 “投之亡地然後存,陷之死地然後生”이다.[6]
이 전투 뒤 한신이 사로잡은 이좌거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대목에서 “싸움에 진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다(敗軍之將,不可以言勇)”,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실수가 있다(智者千慮,必有一失)”는 말도 나왔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5]
《사기》 원문에는 ‘背水陳’으로 적혀 있다. ‘陳’은 ‘陣’과 같은 글자로 쓰였다. 《성어전》은 ‘背水一戰’의 근원을 이보다 앞선 《위료자(尉繚子)》 〈천관(天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양 혜왕이 황제(黃帝)의 형덕(刑德)으로 백전백승할 수 있느냐고 묻자, 위료자는 승패는 날짜나 방위가 아니라 사람의 노력에 달렸다며 이렇게 말했다.[3]
案《天官》曰:「背水陳為絕紀,向阪陳為廢軍。」武王伐紂,背濟水向山阪而陳,以二萬二千五百人,擊紂之億萬而滅商,豈紂不得天官之陳哉!
“《천관》에 ‘물을 등지고 치는 진은 끊어진 땅(絕紀, 일설에는 絕地)이고, 비탈을 향해 치는 진은 쓸모없는 군대’라고 했다. 그런데 무왕은 제수(濟水)를 등지고 산비탈을 향해 진을 쳐서 2만 2500명으로 주왕의 억만 대군을 쳐서 상나라를 멸했으니, 주왕이 천관의 진법을 얻지 못해서였겠는가.” 곧 ‘물을 등진 진’은 한신 이전부터 병가에서 금기로 여기던 배치였다.
‘背水之陣’이라는 네 글자 형태는 뒤의 문헌에 널리 보인다. 명나라 소설 《요해단충록(遼海丹忠錄)》에는 “옛날 한신의 배수지진은 죽을 땅에 둔 뒤에 살게 한 것(昔韓信背水之陣,是置之死地而後生)”이라는 구절이 있다.[7]
오늘날 배수진은 ‘죽기를 각오한 결사의 자세’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사기》의 기록을 보면 한신의 승리는 강을 등진 진 하나로 거둔 것이 아니다. 조나라 군을 비웃게 하고, 거짓으로 패해 성채를 비우게 하고, 숨겨 둔 기병 2천으로 빈 성채를 차지한 계략이 함께 움직였다.
북송의 심괄(沈括)은 《보필담(補筆談)》에서 이 점을 짚었다. “물을 등지고 진을 친 것부터 이미 위험한 길인데, 또 깃발과 북을 버리고 그리로 달아났으니 반드시 지는 형세이다. 그런데도 한신이 이 방법을 쓴 것은, 진여가 노련한 장수여서 반드시 질 형세를 보여 주지 않으면 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신은 자기 재주가 진여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이 계책을 쓴 것이다. 만약 진여가 한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영리했다면 한신이 어찌 지지 않았겠는가.”[8] 명나라 주국정(朱國禎)도 《용당소품(湧幢小品)》 권12에서 사람들이 ‘죽을 땅에 둔 뒤에야 산다’는 말을 할 때마다 한신의 배수진을 끌어대지만, 정작 《사기》의 “모두 죽기로 싸워 무너지지 않았다(殊死戰不可敗)”는 여섯 글자를 읽지 않는다고 꼬집었다.[9]
배수진은 성공 사례만큼 실패 사례도 많아 역사와 소설에서 자주 교훈으로 거론된다.
- 조조의 창정 전투(소설): 《삼국지연의》 제31회에서 정욱(程昱)은 ‘십면매복(十面埋伏)’을 건의하며 “군사를 강가로 물려 복병 열 부대를 두고 원소를 강가까지 끌어들이면, 아군은 물러설 길이 없으니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것”이라고 했다. 조조는 강가에 몰린 군사에게 “앞에 갈 길이 없는데 어찌 죽기로 싸우지 않느냐”고 외쳐 원소를 크게 깨뜨린다.[10]
- 서황의 한수 전투(소설): 제71회에서 서황(徐晃)은 “옛날 한신은 물을 등지고 진을 쳤으니 이른바 죽을 땅에 둔 뒤에 산다는 것”이라며 한수(漢水)를 건너 진을 치려 했다. 부장 왕평(王平)은 “한신은 적이 꾀가 없음을 헤아리고 그 계책을 쓴 것인데, 장군은 조운과 황충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느냐”며 말렸다. 제72회에서 서황은 크게 패해 많은 군사가 한수에 빠져 죽고, 서황과 틀어진 왕평은 유비에게 투항한다.[11]
- 거란의 고려 원정: 《요사(遼史)》 〈야율팔가전(耶律八哥傳)〉에 따르면, 1018년 겨울 고려 원정에 나선 소배압(蕭排押)의 거란군이 개경에 이르러 크게 약탈하고 돌아오다 다하(茶河)·타하(陀河) 두 강에서 고려군의 추격을 받았다. 장수들은 고려군이 두 강을 건너오게 한 뒤 치자고 했으나, 도감 야율팔가만은 “적이 두 강을 건너면 반드시 죽기로 싸울 것이니 위험하다. 두 강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고 반대했다. 소배압은 그 말을 따랐지만 싸움에 졌다.[12] 강을 등진 군대가 필사적으로 싸운다는 배수진의 원리를 적에게 적용해 경계한 예이다. 이 싸움은 고려 쪽 기록의 귀주대첩(1019)과 같은 전투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신립의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신립(申砬)은 충주 달천(㺚川)의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크게 패했다. 신립의 후손 신완(申琓)이 지은 가장(家狀)에 따르면,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조령을 지키자고 하자 신립은 “지금 거느린 군사는 평소 길들인 군사가 아니니, 이른바 저잣거리 사람을 몰아 싸우는 것이다. 죽을 땅에 두지 않으면 죽을힘을 얻을 수 없다”며 달천 가로 물러나 배수진을 쳤다고 한다. 한신의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13] 뒤의 조보양(趙普陽)은 시 〈탄금대(彈琴臺)〉에서 “총병은 꾀가 없었다 할 만하니, 배수의 진이 아이들 장난 같았다(摠兵可謂無謀者。背水之陣如兒戲)”라고 비판했다.[14] 탄금대 전투는 흔히 배수진이 실패한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배수진을 실제 전술로 말한 예와 비유로 쓴 예가 모두 있다.
- 선조 26년(1593) 명나라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조선에 보낸 자문에서 왜선을 불태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도 “배를 불태웠다고 해서 저들이 배수진을 치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 있겠는가(能保其不爲背水之陣乎)”라며, 퇴로가 끊긴 적이 필사적으로 나올 것을 경계했다.[15]
-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양사는 후금 사신을 접견하지 말라고 청하며 “군신 상하가 배수진을 치고 한번 싸워 함께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한다(君臣上下,背水一戰,同死社稷)”고 했다.[16]
- 숙종 2년(1676) 윤휴(尹鑴)가 병거(兵車)를 만들자고 하자 숙종은 “한신은 물을 등지고 이겼지만 그 뒤에는 물을 등지고 졌으니(韓信背水而勝,其後背水而敗), 어찌 병거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같은 방법이라도 쓰는 사람과 형세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뜻이다.[17]
| 한자 | 음 | 기본 의미 | 성어 안의 의미 |
|---|---|---|---|
| 背 | 배 | 등, 등지다 | 뒤에 두다 |
| 水 | 수 | 물 | 강, 물 |
| 之 | 지 | ~의 | 앞말이 뒷말을 꾸미게 함 |
| 陣 | 진 | 진, 진을 치다 | 군대의 진 |
- 이번 분기 안에 흑자를 내지 못하면 사업을 접겠다고 선언하고 배수진을 쳤다.
- 레거시 시스템을 오늘 밤 완전히 내리고 롤백 경로 없이 새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은 배수진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리허설을 충분히 해야 한다.
-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배수진을 친 채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 배수일전(背水一戰): 물을 등지고 한번 싸움. 중국어에서 주로 쓰는 형태.
-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힘. 돌아갈 길을 끊고 결사적으로 싸움.
- 사생결단(死生決斷):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함.
- 필사즉생(必死則生):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 고주일척(孤注一擲): 노름꾼이 남은 밑천을 한 번에 다 걺. 《성어전》은 모험적인 수단에 무게가 있다고 구분한다.[3]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음. 신라 세속오계의 하나.
-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도 물러설 곳이 없으면 필사적으로 맞선다는 점에서 통한다.
- 영어에서는 퇴로를 스스로 끊는다는 뜻으로 ‘burn one's bridges’, ‘burn one's boats’라고 한다. 게임 이론에서는 스스로 선택지를 없애 상대에게 결의를 믿게 만드는 ‘공약(commitment)’ 전략의 예로 설명되기도 한다.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배수지진”,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B0%B0%EC%88%98%EC%A7%80%EC%A7%84, 확인날짜=2026-09-26.
-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배수진”, https://open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focus_name=query&query=%EB%B0%B0%EC%88%98%EC%A7%84, 확인날짜=2026-09-26.
- ↑ 3.0 3.1 3.2 3.3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背水一戰”,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587, 확인날짜=2026-09-26.
- ↑ 4.0 4.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 “背水の陣”,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8%83%8C%E6%B0%B4%E3%81%AE%E9%99%A3, 확인날짜=2026-09-26.
- ↑ 5.0 5.1 5.2 사마천, 《사기》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 ↑ 《손자병법(孫子兵法)》 〈구지(九地)〉.
- ↑ 《요해단충록(遼海丹忠錄)》 제21회.
- ↑ 심괄(沈括), 《보필담(補筆談)》. 명나라 풍몽룡(馮夢龍)의 《지낭(智囊)》 권23에도 인용되어 있다.
- ↑ 주국정, 《용당소품(湧幢小品)》 권12.
- ↑ 나관중,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31회.
- ↑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71회·제72회.
- ↑ 《요사(遼史)》 권80 〈야율팔가전(耶律八哥傳)〉.
- ↑ 신완(申琓), 〈오대조 …… 부군 가장(五代祖……府君家狀)〉, 《경암집(絅菴集)》 권6.
- ↑ 조보양, 〈탄금대(彈琴臺)〉, 《팔우헌선생문집(八友軒先生文集)》 권1.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8권, 선조 26년 5월 1일 갑인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605001_003, 확인날짜=2026-09-26.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10일 정미 3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pa_10502010_003, 확인날짜=2026-09-26.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2월 3일 을묘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sa_10202003_002, 확인날짜=2026-09-26.
- ↑ 사마천,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