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분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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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四分五裂)은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짐을 뜻하는 한자성어이다.[1] 전국 시대 유세가 장의(張儀)가 위(魏)나라 왕을 설득하며 한 말에서 나왔다.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할 나라, 정당, 조직, 여론 따위가 여러 편으로 갈라져 질서를 잃은 모습을 가리킨다. 우리말샘은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짐” 외에 “질서 없이 어지럽게 흩어지거나 헤어짐”, “천하가 심히 어지러워짐”의 뜻도 올리고 있으며, ‘사분오열되다’, ‘사분오열하다’로도 쓴다.[2]
중국어에서도 ‘四分五裂(sì fēn wǔ liè)’라고 하며,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본래 “사방에서 적을 맞아 국토가 쉽게 나뉘고 찢기는 것”을 뜻하다가 뒤에 “흩어져 온전하지 못하고 단결하지 못함”을 형용하게 되었다고 풀이한다.[3] 일본어에서도 ‘四分五裂(しぶんごれつ)’라고 하며, 《일본국어대사전》은 야나가와 슌산(柳河春三)이 엮은 《만국신화(萬國新話)》(1868)의 “인민을 선동하여 사분오열하게 하고”를 첫 용례로 든다.[4]
진(秦)나라를 위해 여섯 나라를 하나씩 떼어 내려던 장의가 위나라 왕에게 합종(合從)을 버리고 진나라를 섬기라고 설득하는 대목이다. 장의는 먼저 위나라가 땅은 사방 천 리가 못 되고 군사는 30만을 넘지 못하며, 땅이 평평하여 이름난 산이나 큰 강의 막힘도 없이 사방의 제후와 통해 있어 “본래 싸움터(故戰場也)”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5]
魏南與楚而不與齊,則齊攻其東;東與齊而不與趙,則趙攻其北;不合於韓,則韓攻其西;不親於楚,則楚攻其南。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
“위나라가 남쪽으로 초나라와 가까이하고 제나라와 가까이하지 않으면 제나라가 동쪽을 칠 것이고, 동쪽으로 제나라와 가까이하고 조나라와 가까이하지 않으면 조나라가 북쪽을 칠 것이며, 한나라와 화합하지 않으면 한나라가 서쪽을 칠 것이고, 초나라와 친하지 않으면 초나라가 남쪽을 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사분오열의 길입니다.”[5]
장의는 이어 진나라를 섬기면 초나라와 한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대왕은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워도 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침안면(高枕安眠)이 나왔다.[3] 같은 유세는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도 실려 있는데, 《사기》에는 위나라가 ‘양(梁)’으로 되어 있다(梁南與楚而不與齊…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6] 곧 사분오열은 본래 나라 안의 분열이 아니라, 사방의 강국에 둘러싸여 어느 쪽과 손잡든 다른 쪽의 공격을 받아 국토가 찢기게 되는 지정학적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서(漢書)》 〈추양전(鄒陽傳)〉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오초칠국의 난 뒤, 제(齊)나라 사람 공손확(公孫玃)이 양(梁)나라 왕에게 제북왕(濟北王)을 변호하며 “제북 땅은 동쪽으로 강한 제나라와 닿고, 남쪽으로 오·월에 끌리고, 북쪽으로 연·조에 위협받으니, 이는 사분오열의 나라(此四分五裂之國)”라고 했다. 이 구절에 삼국 시대 위(魏)의 장안(張晏)은 “사방에서 적을 받고 제북이 그 가운데에 있어 다섯이 된다(四方受敵,濟北居中央爲五)”는 주를, 진(晉)의 진작(晉灼)은 “넷으로 나뉜다는 것은 곧 다섯 갈래로 엇갈려 찢기는 것이니, 밭 전(田) 자와 같다(四分,即交五而裂,如田字也)”는 주를 달았다.[7] 사방의 넷에 가운데를 더해 다섯이 되고, 田 자처럼 가로세로로 금이 가 네 조각, 다섯 조각이 난 모양이라는 풀이다.
병법서 《육도(六韜)》 〈기병(奇兵)〉에는 “사분오열이란 둥근 진을 치고 네모난 진을 깨뜨리는 방법이다(四分五裂者,所以擊圓破方也)”라는 구절이 있어,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거나 적진을 흩어 놓는 전술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8] 《삼국지》 〈사마랑전(司馬朗傳)〉에서는 동탁의 난 때 사마랑이 고향 사람들에게 하내(河內) 땅을 두고 “이곳은 사분오열하여 싸움이 벌어질 땅이니 편안히 지내기 어렵다(此乃四分五裂戰爭之地,難以自安)”며 여양(黎陽)으로 옮기자고 했다. 장의의 말처럼 사방에서 적을 맞는 땅이라는 뜻이다.[9]
《성어전》은 당나라 소영사(蕭穎士)의 표문, 유종원(柳宗元)의 시 〈귀배희(龜背戲)〉, 《주자어류(朱子語類)》, 《송사(宋史)》, 양만리(楊萬里)의 글 등을 용례로 든다.[3] 《주자어류》에서 주희가 여조겸(呂祖謙)의 문인들을 두고 “기상이 시들하고 사분오열하여 저마다 제 말을 하니, 오래되면 반드시 사그라질 것(伯恭門徒氣宇厭厭,四分五裂,各自為說,久之必至銷歇)”이라고 한 것처럼, 송대에 이미 학파나 무리가 갈라지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3]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四分五裂이 9건 보인다.[10]
- 1488년 광주(光州)를 현으로 강등하고 향리들을 변방으로 옮기는 처벌이 내려진 뒤, 대사헌 박안성(朴安性)은 경연에서 “그 고을을 아예 혁파하여 사분오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고을을 없애고 땅을 쪼개어 나눈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이다. 성종은 이시애의 난 때 길주도 현으로 강등만 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1]
- 1600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강항(姜沆)이 올린 보고에는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사분오열되어 있다가 히데요시가 잠시 통합했는데, 그가 죽었으니 다시 갈라질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실려 있다.[12]
- 《선조수정실록》의 이이(李珥) 졸기는 이이가 죽은 뒤 한쪽 당파가 크게 이겨 상대를 몰아냈지만 “안에서 저절로 어그러져 사분오열하더니 끝내 나라의 끝없는 화가 되었다(中自睽乖,四分五裂,竟爲國家無窮之禍)”고 적었다.[13] 조선에서는 이처럼 붕당으로 조정이 갈라지는 모습을 두고 자주 썼다.
한국고전종합DB 문집 원문에서는 32건이 검색된다. 신숙주(申叔舟)는 당나라와 오대 말기에 “번진이 발호하여 사분오열되니 끝내 제어하지 못했다(藩鎭跋扈,四分五裂,終莫能制)”고 썼다.[14]
-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라이선스 변경을 두고 여러 갈래로 포크되면서 개발자 공동체가 사분오열되었다.
- 선거 패배 뒤 당은 책임 공방으로 사분오열했다.
- 장의는 위나라가 사분오열의 땅이라며 진나라를 섬기라고 설득했다.
- 오렬사분(五裂四分), 사분오부(四分五剖), 사분오락(四分五落): 사분오열과 같은 말. 《성어전》은 오렬사분의 용례로 명나라 해서(海瑞)의 글을, 사분오부의 용례로 《한서》 〈양웅전(揚雄傳)〉을 든다.[3]
- 분붕이석(分崩離析): 나라나 집단이 무너지고 흩어짐. 《논어》 〈계씨(季氏)〉에서 나왔다. 《성어전》이 드는 비슷한 말이다.[3]
- 토붕와해(土崩瓦解), 칠령팔락(七零八落):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짐, 여기저기 흩어져 엉망이 됨.[3]
- 반대 의미: 금구무결(金甌無缺): 쇠 사발에 흠이 없다는 뜻으로, 나라의 강토가 온전함.[3]
-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분오열”,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82%AC%EB%B6%84%EC%98%A4%EC%97%B4, 확인날짜=2026-09-28.
- ↑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분오열”, https://open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query=%EC%82%AC%EB%B6%84%EC%98%A4%EC%97%B4, 확인날짜=2026-09-28.
- ↑ 3.0 3.1 3.2 3.3 3.4 3.5 3.6 3.7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四分五裂”,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423, 확인날짜=2026-09-28.
- ↑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사자숙어를 아는 사전(四字熟語を知る辞典)》, “四分五裂”,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5%9B%9B%E5%88%86%E4%BA%94%E8%A3%82, 확인날짜=2026-09-28.
- ↑ 5.0 5.1 《전국책(戰國策)》 〈위책 1(魏策一)〉 “장의가 진나라를 위해 연횡하여 위왕을 설득하다(張儀為秦連橫說魏王)”.
-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70 〈장의열전(張儀列傳)〉.
- ↑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51 〈가추매로전(賈鄒枚路傳)〉 추양(鄒陽) 및 장안·진작 주.
- ↑ 《육도(六韜)》 〈기병(奇兵)〉.
- ↑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15 〈위서(魏書) 사마랑전(司馬朗傳)〉.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 검색 “四分五裂”, https://sillok.history.go.kr/,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211권, 성종 19년 1월 28일 계해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ia_11901028_002,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26권, 선조 33년 6월 9일 경진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3306009_002, 확인날짜=2026-09-28.
-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17년 1월 1일 기묘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b_11701001_001, 확인날짜=2026-09-28.
-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집(保閑齋集)》 권13,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확인날짜=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