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지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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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하지욕(袴下之辱)은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가는 치욕이라는 뜻으로,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아직 뜻을 이루기 전에 남에게 받는 모욕, 또는 큰일을 위해 눈앞의 굴욕을 참는 것을 이르는 고사성어이다.[1] 한나라 개국 공신 한신(韓信)이 젊었을 때 회음(淮陰)의 불량배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갔다는 《사기(史記)》 〈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의 이야기에서 나왔다.
보통 “과하지욕을 견디다”, “과하지욕을 참고 때를 기다리다”처럼 쓴다. 굴욕 그 자체보다, 그 굴욕을 참아 낸 사람이 끝내 큰일을 이루었다는 데 무게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에는 실려 있지 않다.
‘袴’ 자리에 같은 뜻의 ‘胯(사타구니 과)’나 ‘跨(가랑이 과)’를 쓴 ‘胯下之辱’, ‘跨下之辱’도 같은 말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胯下之辱’이 표준 형태이며, 《성어전》은 “사람이 아직 출세하기 전에 업신여김과 비웃음을 받아 치욕을 당함”으로 풀이한다.[1] 일본어에서는 ‘韓信の股くぐり(간신노 마타쿠구리)’라고 하여 “큰 뜻을 가진 사람은 눈앞의 치욕을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쓴다.[2]
淮陰屠中少年有侮信者,曰:「若雖長大,好帶刀劍,中情怯耳。」眾辱之曰:「信能死,刺我;不能死,出我袴下。」於是信孰視之,俛出袴下,蒲伏。一市人皆笑信,以爲怯。
“회음의 백정 무리 가운데 한신을 업신여기는 젊은이가 있어 말했다. ‘너는 덩치가 크고 칼 차기를 좋아하지만 속은 겁쟁이일 뿐이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 앞에서 그를 욕보이며 말했다. ‘한신, 네가 죽을 각오가 있으면 나를 찔러라. 죽을 각오가 없으면 내 가랑이 밑으로 나가라.’ 이에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몸을 숙여 가랑이 밑으로 나가 엎드려 기었다. 온 저잣거리 사람들이 한신을 비웃으며 겁쟁이라고 여겼다.”
이 일이 있기 전, 한신은 생계를 꾸리지 못해 남의 집에 얹혀 밥을 얻어먹었고, 성 밑에서 낚시를 하다가 빨래하던 아낙(漂母)에게 수십 일 동안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걸식표모(乞食漂母)’이다.[3]
뒤에 한신은 유방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초왕(楚王)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밥을 준 빨래하던 아낙에게 천금을 내리고, 밥을 끊었던 남창 정장(亭長)에게는 백 전을 주며 “너는 소인이다. 덕을 베풀다가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게 했던 젊은이를 불러 벼슬을 주었다.
召辱己之少年令出胯下者以爲楚中尉。告諸將相曰:「此壯士也。方辱我時,我寧不能殺之邪?殺之無名,故忍而就於此。」
“자기를 욕보여 가랑이 밑으로 나가게 한 젊은이를 불러 초나라 중위(中尉)로 삼고, 여러 장수와 재상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장사이다. 그가 나를 욕보일 때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여 보았자 이름날 것이 없었으므로 참고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권34 〈한신전〉도 같은 이야기를 싣는데, 젊은이의 말이 “能死,刺我;不能,出跨下”로 조금 짧고 ‘袴’ 대신 ‘跨’를 썼다.[4]
네 글자로 묶은 형태는 서진(西晉) 때 이미 보인다. 진남장군 유홍(劉弘)은 자리를 빼앗기게 된 유교(劉喬)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랑이 밑의 치욕도 오히려 몸을 굽혀 따라야 하거늘, 하물며 자리를 바꾸는 혐의와 사소한 틈 따위겠는가(跨下之辱,猶宜俯就,況於換代之嫌,纖介之釁哉)”라고 달랬다.[5] 당나라 비문에는 ‘胯下之辱’, 북송 유안세(劉安世)의 《원성어록(元城語錄)》에는 “회음후에게는 걸식과 과하의 치욕이 있었다(淮陰有乞食袴下之辱)”가 보인다.[6] 조선에서는 정조가 《주역》 〈계사전〉의 “자벌레가 몸을 굽히는 것은 펴기 위해서다”라는 대목을 강론하며 “장량의 이교 아래 신발, 한신의 과하지욕(張良圯下之履,韓信袴下之辱)”을 굽혔다가 펴는 예로 들었다.[7]
- 그는 첫 회사에서 받은 과하지욕을 잊지 않고, 십 년 뒤 업계 최고의 보안 솔루션을 내놓았다.
- 협상에서 당장 체면을 구기더라도 장기 계약을 지키는 쪽이 낫다며, 대표는 과하지욕을 감수했다.
- 과하지욕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라야 큰일을 맡길 수 있다.
- 《한서》에 따르면 뒤에 한신과 맞선 초나라 장수 용저(龍且)는 “한신은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을 얻어먹었으니 제 몸을 건사할 재주가 없고, 가랑이 밑에서 욕을 당했으니 남을 이길 용기가 없다(寄食於漂母,無資身之策;受辱於跨下,無兼人之勇)”며 그를 얕보았다. 그러나 유수(濰水) 싸움에서 한신의 계책에 걸려 죽었다.[4]
- 일본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이 든 첫 용례는 조루리 〈겐지 오조시(源氏大草紙)〉(1770)의 “한신의 가랑이와 빨래하는 아낙의 밥(韓信が股漂母の食)”으로, 일본에서도 과하지욕과 걸식표모를 짝지어 썼음을 보여 준다.[2]
- ↑ 1.0 1.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胯下之辱”,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0184, 확인날짜=2026-10-10.
- ↑ 2.0 2.1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 “韓信の股潜り”,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9%9F%93%E4%BF%A1%E3%81%AE%E8%82%A1%E6%BD%9C%E3%82%8A, 확인날짜=2026-10-10.
- ↑ 3.0 3.1 3.2 3.3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권92 〈회음후 열전(淮陰侯列傳)〉.
- ↑ 4.0 4.1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34 〈한팽영노오전(韓彭英盧吳傳)〉 한신.
- ↑ 《진서(晉書)》 권61 〈유교전(劉喬傳)〉.
- ↑ 마영경(馬永卿) 편, 《원성어록(元城語錄)》 권중.
- ↑ 정조(正祖), 〈계사하전 제5장(繫辭下傳第五章)〉,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04,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