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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은 울면서 마속(馬謖)을 벤다는 뜻으로, 큰 목적이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아끼는 사람도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처벌함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 중국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군령을 어기고 가정(街亭) 싸움에서 크게 진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처형한 데서 유래한다.[1]

조직의 기강이나 원칙을 세우기 위해 측근이나 아끼는 사람에게도 책임을 묻는 결정을 가리킬 때 쓴다. 인사 조치나 징계를 발표하면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라고 말하는 식으로 흔히 쓰인다. 처벌하는 쪽의 괴로움(泣)과 원칙의 엄정함(斬)이 함께 담긴 말이다.

나라마다 쓰는 형태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네 글자 ‘읍참마속’으로 쓰고, 중국에서는 《삼국지연의》의 회목(回目)을 따라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泣いて馬謖を斬る(울며 마속을 베다)’라고 풀어서 말한다.[2]

정사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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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이며, 유비를 섬긴 마량(馬良)의 아우이다. 서진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는 마속의 전기가 따로 없고, 권39 〈촉서〉 마량전 뒤에 붙어 있다.[3]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말이 “《삼국지》의 〈마속전(馬謖傳)〉”에 나온다고 적고 있으나, 따로 된 〈마속전〉은 없다.[1]

마속은 재주가 뛰어나고 군사 계책을 논하기를 좋아해 제갈량이 매우 아꼈다. 그러나 유비는 죽음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오. 그대는 잘 살피시오(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君其察之)”라고 일렀다. 제갈량은 그렇게 여기지 않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밤낮으로 함께 의논했다.[3]

건흥(建興) 6년(228)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북벌에 나설 때, 사람들은 노장 위연(魏延)이나 오일(吳壹)을 선봉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제갈량은 뭇사람의 뜻을 어기고 마속을 발탁해 대군을 이끌고 앞서게 했다. 마속은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과 가정에서 싸워 크게 졌고, 제갈량은 나아갈 발판을 잃어 한중으로 물러났다.

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良死時年三十六,謖年三十九。

[3]

“마속은 옥에 갇혀 죽었고, 제갈량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마량은 죽을 때 서른여섯 살, 마속은 서른아홉 살이었다.”

같은 책의 다른 편은 조금씩 다르게 적었다. 〈제갈량전〉은 “마속을 죽여 무리에게 사죄했다(戮謖以謝眾)”고 하고, 제갈량이 스스로 벼슬을 세 등급 깎아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고 적었다.[4] 〈왕평전〉에는 “승상 제갈량이 마속과 장군 장휴(張休)·이성(李盛)을 베었다(既誅馬謖及將軍張休、李盛)”고 되어 있고, 〈상랑전(向朗傳)〉에는 상랑이 평소 마속과 친해서 “마속이 달아났을 때 사정을 알고도 들추지 않았다(謖逃亡,朗知情不舉)”가 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5] 처형을 말린 사람도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승상참군 이막(李邈)은 제갈량이 마속을 죽이려 하자 “진(秦)나라는 맹명(孟明)을 용서하여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초나라는 자옥(子玉)을 죽여 두 대에 걸쳐 떨치지 못했다(秦赦孟明,用伯西戎,楚誅子玉,二世不競)”며 간했다가, 제갈량의 뜻을 거슬러 촉으로 돌려보내졌다.[6]

배송지 주의 《양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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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송나라 배송지(裴松之)가 붙인 주석에는 동진 습착치(習鑿齒)의 《양양기(襄陽記)》가 인용되어 있어, 오늘날 알려진 이야기의 뼈대가 여기서 나온다.[3] 마속은 죽기 전 제갈량에게 글을 보내 “공께서는 저를 아들처럼 보셨고 저는 공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일으킨 뜻을 깊이 헤아려 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황천에서 여한이 없겠습니다”라며 뒷일을 부탁했고, 이때 십만 군사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제갈량은 몸소 제사를 지내고 그 유족을 평소처럼 돌보았다.

뒤에 장완(蔣琬)이 한중에 와서 “옛날 초나라가 득신(得臣)을 죽이자 진 문공이 기뻐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략 있는 선비를 죽였으니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답했다.

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是以楊干亂法,魏絳戮其僕。四海分裂,兵交方始,若復廢法,何用討賊邪!

“손무가 천하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법을 분명하게 썼기 때문이오. 그래서 양간(楊干)이 법을 어지럽히자 위강(魏絳)이 그 마부를 죽였던 것이오. 온 세상이 갈라져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엇으로 적을 치겠소!” 위강의 고사는 《춘추좌씨전》 양공 3년에 나오는 일로, 위강은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남긴 바로 그 인물이다.

습착치는 이 결정을 비판했다. 촉은 인재가 적은 작은 나라인데 뛰어난 인물을 죽였고, 유비가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한 사람을 크게 썼다가 실패하자 죽였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이다.[3]

《삼국지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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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소설 《삼국지연의》는 이 이야기를 극적으로 다듬었다. 청나라 모종강(毛宗崗) 본 제96회의 회목은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孔明揮淚斬馬謖)”이다.[7] 소설에서 마속은 스스로 몸을 묶고 장막 앞에 꿇어앉고, 장완은 처형 직전에 달려와 말리며, 제갈량은 처형 뒤에 “내가 우는 것은 마속 때문이 아니다. 선제께서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 들어맞았으니, 나의 밝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이다”라며 통곡한다.[7]

정사와 비교하면, 정사의 마속은 옥에서 죽었거나(마량전) 처형되었고(제갈량전·왕평전) 한때 달아나기도 했으며(상랑전), 장완의 물음도 처형이 끝난 뒤의 일이다. 제갈량의 눈물을 유비의 경고와 직접 이은 것도 소설의 구성이다.

한국 문헌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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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글자에 가까운 ‘泣斬馬謖’은 조선 문헌에서 이미 보인다.

  • 황섬(黃暹)은 임진왜란 중인 갑오년(1594)에 올린 상소에서 신상필벌의 믿음을 강조하며 “진 효공은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약속한 상을 어기지 않아 패업을 이루었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어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켰다(諸葛亮泣斬馬謖。致服人心)”고 했다.[8]
  • 선조 29년(1596)의 상소에는 “옛날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 것이 어찌 어질지 못해서였겠습니까(昔者諸葛亮,涕泣而斬馬謖,豈不仁而然哉)”라며 장수들을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라는 대목이 있다.[9]
  • 영조는 9년(1733) 민형수(閔亨洙)를 처벌하며 “옛날에도 박소(薄昭)의 일과 공명이 울며 마속을 벤 일(孔明泣斬馬謖)이 있었다”고 했다.[10] 18년(1742)에는 어전에서 다툰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와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을 군율로 다스리려다 대신들의 만류로 삭직에 그치면서 “나는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 고사를 본받으려 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予欲效諸葛亮垂涕斬馬謖之故事,而今未果也)”고 말했다.[11]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泣 읍 울다 눈물을 흘리며
斬 참 베다 목을 베다, 처형하다
馬 마 말 마속의 성
謖 속 일어나다 마속의 이름
  • 토사구팽(兔死狗烹)과는 뜻이 반대에 가깝다. 토사구팽은 쓸모가 다한 사람을 버리는 비정함을 비판하는 말이고, 읍참마속은 원칙을 지키려고 아끼는 사람을 괴로움을 무릅쓰고 처벌하는 결단을 가리킨다.
  • 대표는 핵심 개발자였던 팀장이 고객 데이터를 무단 반출한 사실을 확인하고,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징계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 보안 규정 위반에 예외를 두면 규정 자체가 무너진다. 아끼는 직원이라도 읍참마속할 수밖에 없었다.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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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 중국어에서 쓰는 형태.
  • 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돌보지 않음.
  • 대공무사(大公無私), 선공후사(先公後私): 공적인 일을 앞세우고 사사로운 정을 뒤로함.
  • 신상필벌(信賞必罰): 상과 벌을 엄정하고 분명하게 함.
  1. ↑ 1.0 1.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읍참마속”,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C%9D%8D%EC%B0%B8%EB%A7%88%EC%86%8D, 확인날짜=2026-09-26.
  2. ↑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 “泣いて馬謖を斬る”,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B3%A3%E3%81%84%E3%81%A6%E9%A6%AC%E8%AC%96%E3%82%92%E6%96%AC%E3%82%8B, 확인날짜=2026-09-26.
  3. ↑ 3.0 3.1 3.2 3.3 3.4 진수(陳壽), 《삼국지(三國志)》 권39 〈촉서(蜀書)〉 마량전(馬良傳) 부(附) 마속(馬謖).
  4. ↑ 진수, 《삼국지》 권35 〈촉서〉 제갈량전.
  5. ↑ 진수, 《삼국지》 권43 〈촉서〉 왕평전; 권41 〈촉서〉 상랑전.
  6. ↑ 상거(常璩), 《화양국지(華陽國志)》 권10 중; 진수, 《삼국지》 권45 〈촉서〉 양희전(楊戲傳) 배송지 주 인용.
  7. ↑ 7.0 7.1 나관중(羅貫中),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제96회 〈공명휘루참마속 주방단발잠조휴(孔明揮淚斬馬謖 周魴斷髮賺曹休)〉.
  8.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황섬, 《식암집(息庵集)》 권3 〈근친후환경상소(覲親後還京上疏)〉,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709A_0040_020_0040, 확인날짜=2026-09-26.
  9.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73권, 선조 29년 3월 22일 기축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na_12903022_002, 확인날짜=2026-09-26.
  10.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35권, 영조 9년 7월 16일 을미 4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ua_10907016_004, 확인날짜=2026-09-26.
  11.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56권, 영조 18년 8월 23일 기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ua_11808023_001, 확인날짜=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