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은 큰 도리를 지키기 위하여 부모나 형제도 돌아보지 않음을 이르는 한자성어이다.[1]

대의멸친은 나라와 공의(公義)를 위해 사사로운 혈육의 정을 끊는 것을 말한다. 원래는 임금을 죽인 역적에 가담한 아들을 아버지가 직접 처단하게 한 이야기에서 나온 말로, 역사에서는 반역이나 중죄를 저지른 왕족·외척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자주 쓰였다. 오늘날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잘못이라도 감싸지 않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는 태도를 가리킬 때 쓴다.

중국어에서도 같은 한자로 쓰며, 대만 교육부 《성어전》은 “공리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죄지은 가족을 없애거나 법의 심판을 받게 함”으로 풀이한다.[2] 일본어에서는 ‘大義親を滅す(たいぎしんをめっす)’라는 문장 형태로 쓴다.[3]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과 4년 조에 나오는 위(衛)나라 석작(石碏)의 이야기에서 나왔다.[4]

위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는 총애받는 첩의 소생으로, 임금의 사랑을 믿고 군사 일을 좋아했다(公子州吁,嬖人之子也,有寵而好兵). 대부 석작은 장공에게 “자식을 사랑한다면 올바른 도리로 가르쳐 그릇된 길에 들지 않게 해야 한다(臣聞愛子,教之以義方,弗納于邪)”며 주우를 지나치게 총애하지 말라고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기 아들 석후(石厚)가 주우와 어울리는 것도 막으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其子厚與州吁游,禁之,不可). 석작은 환공(桓公)이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4]

기원전 719년 주우는 이복형인 위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석후가 아버지 석작에게 임금 자리를 안정시킬 방법을 묻자, 석작은 주나라 천자를 알현해 인정을 받으면 되는데, 천자의 총애를 받는 진(陳)나라 환공을 통하면 알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몰래 진나라에 사람을 보냈다.

石碏使告于陳曰:「衛國褊小,老夫耄矣,無能為也。此二人者,實弒寡君,敢即圖之。」陳人執之,而請涖于衛。九月,衛人使右宰醜涖殺州吁于濮,石碏使其宰獳羊肩涖殺石厚于陳。君子曰:「石碏,純臣也,惡州吁而厚與焉。大義滅親,其是之謂乎!」

“위나라는 땅이 좁고 작으며 이 늙은이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실로 우리 임금을 시해했으니, 부디 처치해 주십시오.” 진나라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붙잡아 두고 위나라에 와서 처형에 입회해 달라고 청했다. 9월에 위나라는 우재(右宰) 추(醜)를 보내 복(濮)에서 주우를 죽이게 했고, 석작은 자기 가신 누양견(獳羊肩)을 보내 진나라에서 석후를 죽이게 했다. 군자는 이렇게 평했다. “석작은 순수한 신하이다. 주우를 미워하여 거기에 가담한 아들 석후까지 함께 벌했다. ‘대의멸친’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4]

“其是之謂乎(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는 말투로 보아, ‘대의멸친’은 석작의 일 이전부터 쓰이던 말을 《좌전》의 군자가 끌어다 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어전》은 이 말이 뒤에 역대 사서에서 널리 쓰인 예를 여럿 든다. 《후한서》에서 장제(章帝)가 태자 유경(劉慶)을 폐하며 “대의멸친이라 했거늘 하물며 강등쯤이야”라고 한 조서, 《삼국지》 배송지 주의 “《춘추》의 뜻에 대의멸친이 있으니, 주공은 아우를 죽였고 석작은 아들을 죽였으며 계우는 형을 짐독으로 죽였다(故周公誅弟,石碏戮子,季友鴆兄)”, 《구당서》에서 이세민에게 결단을 촉구하며 “주공은 성인인데 어찌 골육에게 정이 없었겠습니까. 사직을 보존하려고 대의멸친한 것입니다”라고 한 말 등이다.[2] 이처럼 이 말은 왕실 안의 권력 다툼에서 친족을 제거하는 명분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국 문헌의 용례

편집 원본 편집
  •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을 대신해 쓴 장계에서, 화주(華州)를 지키지 못한 고변의 당질 고소(高劭)를 군령대로 처벌해 달라고 청하며 “대의멸친은 《좌전》이 일찍이 남긴 가르침(大義滅親。傳曾垂訓)”이라고 썼다.[5]
  • 고려 말 정도전(鄭道傳)은 1391년 도당에 올린 글에서 석작이 주우 때문에 아들 석후까지 죽인 고사를 들며, 난신적자는 친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50건이 넘게 나온다. 가장 이른 예는 태종 8년(1408)의 기사들로, 대간은 왕비 민씨(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거듭 청하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를 너그럽게 베푸시어 대의멸친하지 않으시니(殿下寬布私恩,不以大義滅親)”라고 했다.[7][8] 조선에서도 이 말은 주로 왕실의 인척이나 종친을 벌하라는 요구에 쓰였다.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大 대 크다 큰
義 의 옳다, 의리 도리, 대의
滅 멸 멸하다, 없애다 (사사로운 정을) 끊다, 죽이다
親 친 어버이, 친하다 혈육, 친족
  • 대의명분(大義名分)과 앞 두 글자가 같지만 뜻은 다르다. 대의명분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나 떳떳한 명분을 말하고, 대의멸친은 그 대의를 위해 혈육의 정까지 끊는 행동을 말한다.
  • 일본어 사전 《고사성어를 아는 사전》은 여기서 ‘대의’가 주로 국가나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3]
  • 내부 감사에서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연루된 비리가 드러나자, 그는 대의멸친의 자세로 수사 기관에 모든 자료를 넘겼다.
  • 권한을 준 사람이 가까운 동료라도 보안 규정을 어겼다면 예외 없이 계정을 막는 것이 원칙이다. 대의멸친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 일본에서는 다카미 준(高見順)의 소설 《故旧忘れ得べき》(1935~36)의 “대의친을 멸한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를 택할 것인가, 동지를 택할 것인가”라는 구절이 사전 용례로 실려 있다.[3]

유의어와 관련 표현

편집 원본 편집
  • 멸사봉공(滅私奉公):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적인 일을 위해 힘써 일함.
  • 선공후사(先公後私):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룸.
  • 대공무사(大公無私): 매우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음.
  • 철면무사(鐵面無私):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엄정함.
  • 읍참마속(泣斬馬謖): 큰 목적을 위해 아끼는 사람을 버림.
  1.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대의멸친”,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8C%80%EC%9D%98%EB%A9%B8%EC%B9%9C, 확인날짜=2026-09-26.
  2. ↑ 2.0 2.1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大義滅親”,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175, 확인날짜=2026-09-26.
  3. ↑ 3.0 3.1 3.2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고사성어를 아는 사전(故事成語を知る辞典)》·《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大義親を滅す”,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5%A4%A7%E7%BE%A9%E8%A6%AA%E3%82%92%E6%BB%85%E3%81%99, 확인날짜=2026-09-26.
  4. ↑ 4.0 4.1 4.2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 3년·4년.
  5.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최치원, 《계원필경집》 권5 〈주질남소화주실수청행군령장(奏姪男劭華州失守請行軍令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01A_0060_010_0030, 확인날짜=2026-09-26.
  6.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정도전, 《삼봉집》 권3 〈상도당서(上都堂書)〉,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024A_0060_030_0040, 확인날짜=2026-09-26.
  7.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9월 3일 무신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ca_10809003_001, 확인날짜=2026-09-26.
  8.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 10월 1일 을해 6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ca_10810001_006, 확인날짜=202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