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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망덕(背恩忘德)은 남에게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배신하는 태도를 뜻하는 한자성어이다.[1]

도움이나 은혜를 받고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등을 돌리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을 꾸짖을 때 쓴다. “배은망덕한 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처럼 강한 비난의 말로 흔히 쓰인다. ‘배은(背恩)’은 은혜를 저버림, ‘망덕(忘德)’은 베푼 덕을 잊음이다.[2] 현대 중국어에서는 같은 뜻으로 ‘망은부의(忘恩負義)’, ‘은장구보(恩將仇報)’를 주로 쓰고,[3][4] 일본어에서는 ‘恩知らず(おんしらず)’, ‘忘恩(ぼうおん)’이라고 한다.[5]

《한서》의 ‘背恩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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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은 ‘망은부의(忘恩負義)’의 근원을 《한서(漢書)》 권76 〈장창전(張敞傳)〉의 ‘배은망의(背恩忘義)’에서 찾는다.[3] 배은망덕도 같은 계열의 말이다.

한나라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으로 수도 장안을 다스리던 장창(張敞)은 가까운 벗 양운(楊惲)이 대역죄로 처형되자 그 무리로 몰려 탄핵을 받았다. 그러자 장창이 아끼던 아전인 적포연(賊捕掾) 서순(絮舜, 성을 ‘여’로 읽기도 한다)은 “이제 닷새짜리 경조윤(五日京兆)일 뿐인데 무슨 일을 더 하겠는가”라며 맡은 사건을 내버려 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장창은 서순을 옥에 가두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죽을죄로 다스렸고, 형을 집행하기에 앞서 “닷새짜리 경조윤이 결국 어떠하냐? 겨울이 다 갔는데 목숨을 늘릴 수 있겠느냐?”라는 글을 보낸 뒤 저잣거리에서 처형했다(乃棄舜市).[6] 서순의 집안사람들이 시신을 수레에 싣고 장창의 글을 엮어 억울한 옥사를 살피는 사자에게 호소하자, 장창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죄로 벼슬을 잃고 서인이 되었다.

몇 달 뒤 장안의 치안이 다시 어지러워지자 선제는 장창을 다시 불렀다. 이때 장창이 올린 글에 이 말이 나온다.[6]

臣前幸得備位列卿,待罪京兆,坐殺賊捕掾絮舜。舜本臣敞素所厚吏,數蒙恩貸,以臣有章劾當免,受記考事,便歸臥家,謂臣『五日京兆』,背恩忘義,傷化薄俗。臣竊以舜無狀,枉法以誅之。臣敞賊殺無辜,鞠獄故不直,雖伏明法,死無所恨。

“신은 전에 요행히 경조윤 자리에 있다가 적포연 서순을 죽인 죄에 걸렸습니다. 서순은 본래 신이 평소 두터이 대하던 아전으로 여러 번 은혜와 너그러움을 입었는데, 신이 탄핵을 받아 파면될 처지가 되자 맡긴 일을 받고도 집에 돌아가 누워서는 신을 ‘닷새짜리 경조윤’이라 했으니, 은혜를 저버리고 의리를 잊어 교화를 해치고 풍속을 경박하게 한 것입니다. 신은 서순이 무례하다고 여겨 법을 굽혀 죽였습니다. 신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옥사를 일부러 바르지 않게 다스렸으니, 법에 따라 벌을 받아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선제는 장창을 불러 보고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삼았다.

나무위키 등에는 장창이 서순을 옥에 가두어 ‘옥중에서 죽게 했다’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으나, 원문에는 옥에 가두어 죄를 다스린 뒤 “저잣거리에 내다 버렸다(棄舜市)”, 곧 공개 처형했다고 되어 있다. 이 일이 드러난 것도 감찰관이 알아낸 것이 아니라 서순의 집안사람들이 시신과 장창의 글을 들고 사자에게 직접 호소했기 때문이다.[6]

‘背恩忘德’ 네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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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恩忘德’이라는 형태는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격문에 보인다. 장수 위효관(韋孝寬)의 이름으로 진(陳)나라를 치며 낸 작자 미상의 〈위행군원수운국공위효관격진문(爲行軍元帥鄖國公韋孝寬檄陳文)〉은, 진패선(陳霸先)이 자신을 이끌어 준 왕승변(王僧辯)을 기습해 죽인 일을 두고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어 그릇을 깨고 가지를 꺾었다(背恩忘德,毀器折枝)”고 비난했다.[7] 송나라 운서 《증수호주예부운략(增修互注禮部韻略)》과 명나라 《홍무정운(洪武正韻)》은 ‘負(부)’ 자를 풀이하며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는 것을 負라 한다(背恩忘德曰負)”고 적었다.[8] 옛 중국 문헌에도 쓰인 말이지만, 오늘날 중국어에서는 드물게 쓴다.

한국 문헌의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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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이른 예는 정종 2년(1400)의 기사이다. 태상왕(태조 이성계)은 세자(뒤의 태종)에게 조온(趙溫)과 조영무(趙英茂)를 두고 “내가 그 미천함을 불쌍히 여겨 옷과 관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개국공신으로 경상의 지위에 이르게 했는데, 무인년(1398)에 내가 병들었을 때 옛날 아껴 준 은혜를 돌아보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안에서 호응했으니,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음이 비할 데 없다(背恩忘德,無可比者)”고 했다.[9] 제1차 왕자의 난을 가리킨 말이다.

이후 실록에서는 조선이 땅이나 생업을 허락해 준 대마도 왜인, 식량과 물자를 대 주던 압록강·두만강 일대 여진 부족이 변경을 침범했을 때 이들을 꾸짖는 말로 자주 쓰였다.

  • 세종 2년(1420) 박은(朴訔)은 대마도 사신을 박대하고 “그 섬이 은혜를 저버리고 덕을 잊은 까닭(其島背恩忘德之由)”을 엄히 꾸짖자고 했다.[10]
  • 세종 15년(1433) 파저강 야인 토벌을 논의할 때에는 “올량합(兀良哈)은 우리 북문에 살며 입고 먹는 것을 실로 우리나라에 기대면서 도리어 노략질을 하니, 배은망덕이 심하다(背恩忘德甚矣)”는 말이 나왔다.[11]
  • 세종 25년(1443) 조정은 고초도(孤草島)에서 고기잡이를 허락받고도 변경을 노략질한 지세포(知世浦) 거주 왜인들을 “나라가 너희 청을 들어주었는데 너희가 배은망덕하여 우리 땅을 침범했다”고 추궁하게 했다.[12]
  •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뒤의 논의에서도 성희안(成希顔)은 “저 섬이 배은망덕하여 스스로 그 죄를 안다”고 했다.[13]
한자 음 기본 의미 성어 안의 의미
背 배 등, 등지다 저버리다, 배반하다
恩 은 은혜 입은 은혜
忘 망 잊다 잊다
德 덕 덕, 은덕 베풀어 준 덕
  • 창업 초기에 코드를 가르쳐 준 선배의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베껴 특허 소송까지 건 것은 배은망덕한 처사였다.
  • 키워 준 회사의 기밀을 들고 경쟁사로 옮겨 간 배은망덕한 일에 업계가 등을 돌렸다.
  • 이 고사의 주인공 장창(張敞)은 아내의 눈썹을 그려 주었다는 ‘장창화미(張敞畫眉)’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서》의 같은 전에 따르면, 장안에 “장 경조의 눈썹이 곱다”는 소문이 돌아 관리가 이를 아뢰자, 장창은 선제에게 “규방 안 부부 사이의 일에는 눈썹 그리는 것보다 더한 것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6]

유의어와 관련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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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은망의(背恩忘義), 망은배의(忘恩背義), 망은부의(忘恩負義):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림.[3]
  • 은장구보(恩將仇報): 은혜를 원수로 갚음. 우리 속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와 같다.
  • 토사구팽(兔死狗烹): 필요할 때 쓰고 필요 없으면 버림. 은혜를 저버린다는 점에서 통한다.
  • 견리망의(見利忘義):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음.
  • 반대 의미: 결초보은(結草報恩), 각골난망(刻骨難忘), 백골난망(白骨難忘).
  1.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배은망덕”,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B0%B0%EC%9D%80%EB%A7%9D%EB%8D%95, 확인날짜=2026-09-27.
  2.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배은”,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searchKeyword=%EB%B0%B0%EC%9D%80, 확인날짜=2026-09-27.
  3. ↑ 3.0 3.1 3.2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忘恩背義”(義參 “忘恩負義”),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4251, 확인날짜=2026-09-27.
  4. ↑ 대만 교육부 《성어전(成語典)》 2020, “恩將仇報”, https://dict.idioms.moe.edu.tw/idiomView.jsp?ID=6893, 확인날짜=2026-09-27.
  5. ↑ 《디지털 대사천(デジタル大辞泉)》, “恩知らず”, 코토뱅크, https://kotobank.jp/word/%E6%81%A9%E7%9F%A5%E3%82%89%E3%81%9A, 확인날짜=2026-09-27.
  6. ↑ 6.0 6.1 6.2 6.3 반고(班固), 《한서(漢書)》 권76 〈장창전(張敞傳)〉.
  7. ↑ 엄가균(嚴可均) 편, 《전후주문(全後周文)》 권21, 〈위행군원수운국공위효관격진문(爲行軍元帥鄖國公韋孝寬檄陳文)〉.
  8. ↑ 《증수호주예부운략(增修互注禮部韻略)》 권3; 《홍무정운(洪武正韻)》 권9.
  9.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을축 8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ba_10207002_008, 확인날짜=2026-09-27.
  10.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1월 1일 을축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0211001_002, 확인날짜=2026-09-27.
  11.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15일 기해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1502015_002, 확인날짜=2026-09-27.
  12.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6월 10일 계사 5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da_12506010_005, 확인날짜=2026-09-27.
  13.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2권, 중종 5년 10월 17일 경자 2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wka_10510017_002, 확인날짜=2026-09-27.